겨울에 키가 크는 아이들
겨울에 키가 크는 아이들
  • 추주연 충북도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21.11.24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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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추주연 충북도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추주연 충북도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사람을 야행성과 주행성으로만 나눈다면 나는 어정쩡한 야행성이다. 밤을 좋아하는 건지 아침잠을 좋아하는 건지 몰라도 분명한 것은 출근 걱정 없는 토요일 밤이 좋다. 토요일엔 어김없이 새벽까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책도 읽는데 오늘 밤은 사정이 다르다.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고 잠을 청한다. 내일 아침 일찍 아들을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결혼한 날, 아들은 제대를 한다. 포상 휴가를 받아 앞당겨진 일정이 우연찮게 결혼기념일과 같은 날이 된 것이다. 코로나19로 입대할 때 데려다준 것을 제외하고는 면회 한 번 가지 못하고 끝난 아들의 군생활이다. 혼자 오겠다는 아들에게 나중에 서운했단 소리 듣기 싫다며 부부가 우겨서 원주까지 가기로 했다. 원주 터미널 부근은 군복 입은 청년들이 학교 근처 교복 입은 학생들만큼 흔하다. 똑같아 보이는 군인들 중에 신기하게도 아들의 모습은 금테를 두른 것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멀리서 아들이 뛰어온다. 그동안 어깨가 더 넓어진 아들을 두 팔 벌려 힘껏 안아주었다. 보기엔 쑤욱 커버린 아들인데 어린아이처럼 품에 쏙 안긴다. 휴가를 나와서도 제대를 하고도 아들은 군대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어땠냐는 물음에 친구들과 캠핑하는 기분이었다고만 하더니 말끝에 세상에 부조리한 것이 참 많다는 걸 경험했고, 부조리에 맞서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몸 키보다 마음 키가 더 자란 아들이다.

아들과 만나 집으로 오는 중에 제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해병에 입대하기 전 연수원으로 나를 찾아왔던 제자다. 7주간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수색대 훈련을 받고 있다고 소식을 전한다. 긴장되고 힘든 시기일 텐데 나에게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고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잔소리다. 이 녀석이 남 걱정할 처지인가 싶은 마음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아들 하나가 제대하니 또 다른 아들이 입대한 기분이다. 하나같이 힘든 속에서 철이 드는 모습에 마음이 아리다.

며칠 전 미 공군의 폭격 훈련장이었던 화성 매향리로 탐방연수를 다녀왔다. 일상의 평화를 피폐하게 만든 전쟁의 흔적을 마을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매향리 사람들은 군사 훈련용 낙하산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포탄으로 양동이를 만들어 썼다고 한다.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제법 종소리가 나는 포탄 종이었다. 미군의 포탄으로 만든 종을 마을 사람들은 평화의 종이라 불렀다. 불이 나거나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종을 쳐서 마을 사람들이 모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매향리 사람들은 전쟁을 위해 만든 무기로 평화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도 평화를 만들 듯 아이들은 군사 훈련 속에서도 성장한다.

집으로 올라가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예닐곱 살쯤으로 보이는 딸과 엄마의 대화에 귀가 쫑긋해졌다. 엄마는 딸의 바지 밑단을 접어 올려주고 있었다.

“엄마, 나 키 크겠지? 이제 겨울이니까.”

겨울 동안 키가 쑥쑥 자랄 테니 키보다 큰 바지를 기꺼이 입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겨울 지나면 아이들 키가 훌쩍 큰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매서운 추위를 겪고 나서야 키가 크는 걸까? 성장통을 겪는 우리 아이들의 겨울이 마냥 춥지만은 않기를. 마음만큼은 따뜻한 겨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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