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새벽을 걷다
만추(晩秋), 새벽을 걷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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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날마다 음악을 듣던 이어폰이 고장 나면서 가을이 시나브로 깊어지는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휴대전화를 통해 전송되는 음악방송을 갑자기 듣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겨울이 고요하게 찾아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깜깜한 세상의 새벽길을 걷던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여태 시커먼 어둠이 무섭게 느껴지는 건 잃어버린 단 하나의 감각 때문입니다.

인공(人工), 그중에서도 특히 디지털 음원에 의존해 검은 새벽이 두렵지 않았던 날들은 `소리'가 내 몸과 세상을 이어주는 긴밀한 믿음이었음을, 그 만들어진 소리가 끊어진 새벽길에서 마침내 느끼게 됩니다.

머리카락을 쭈뼛 세우는 순간순간의 무서운 흔들림을 몇 차례 겪어 본 어두운 새벽길에서 새로운 감각이 눈뜨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안개비는 주척주척 내리고 있었고, 며칠째 찬바람을 맞은 숲은 울창하던 잎을 지상으로 내리고 사뭇 야위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숨어 있던 자연의 무수한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푸르던 나뭇잎들이 색깔을 바꾼 뒤, 아름다운 변화의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지상으로 낙하하는 소리쯤은 익숙한 일입니다.

바닥을 뒹굴며 바람에 쫓겨나는 낙엽의 아우성 소리도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그런 가을은 그저 스산할 뿐 깊어지고 있는 것임을 차마 깨닫지 못합니다.

다만 인공의 소리가 모두 소거된 고요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리는 내 발자국 소리는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살아있음, 그리고 움직임'의 소중한 의미임을 알게 합니다.

안개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가지 끝에 매달려 새벽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던 나뭇잎에 안개비가 내리는, 아니 수직과 수평이 슬며시 맞닿는 소리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발길에 차이는 마른 풀들의 낮은 몸에도 안개비의 애무는 빠짐없고 변함없습니다.

뭇 나무들이 생명이었던 잎들을 떠나보내고 풀들은 메말라 지상과 밀착하는 계절의 뜻은 공간을 더 크게 키우는 일입니다. 바람의 크기도 커지고 거칠 것 없는 만큼 사람의 생각도 더 깊어지고 넓어지며 침착해지기를. 가을은 다가오는 겨울에 끊임없이 뜻을 전합니다.

한참을 걸었음에도 여태 세상은 밝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안개비는 한층 가녀려지면서 낙하하는 대신 분무가 되어 천지사방에 흩뿌려집니다.

사물은 더욱 분간할 수 없이 깊어지면서 무심천 기나 긴 둔치의 길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내 한 몸뿐이라는 착각에 휩싸이게 합니다.

이 순간 나는 인공의 것들과는 완벽하게 결별하거나 차단된 채, 자연과 완벽하게 일치되는 다른 세상의 새벽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오직 자연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자연 속에서 깊어지는 생각과 깨달음으로 나를 채우면서 더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고요해지고 있습니다.

인공의 소리를 잃고 나서야 자연의 소리를 통해 깊은 가을과 고요한 겨울의 접점이 심연의 세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감각을 통해 `생각'이 되살아남을 각성하는 계절, 나는 만추(晩秋)의 새벽을 두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깊게 걷고 있습니다.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 뜯어 달아난다 /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 자비에 대하여 /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 빗줄기가 지나간다 /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 거리마다 풀들이 /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 모든 것은 /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 모든 것은 /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나희덕. 11월>



첫눈 내리면 모두에게 눈부신 계절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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