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할까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할까
  • 신찬인 충북도청소년종합진흥원장
  • 승인 2021.11.22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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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찬인 충북도청소년종합진흥원장
신찬인 충북도청소년종합진흥원장

 

그곳은 마치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과 같았다. 월악산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좁은 농로를 따라가니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다. 가옥은 몇 채 있는데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벽촌이다. `이 동네에 있나 보다'라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내비게이션은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다. 억새가 반짝거리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산자락에 딸린 넓은 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설마 이곳에 서점이 있을까,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할 즈음 `새한서점'이라는 작은 팻말이 보인다. 팻말은 있는데 서점은 보이지 않는다. 한참이나 주변을 둘러보다 혹시나 해서 계곡 아래로 내려가니 숲 속에 허름한 건물이 보인다. 순간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작은 섬을 만난 것처럼 반가움과 경이로움이 교차했다.

맑고 고운 가을 햇살이 은은하게 퍼지는 숲은 시간이 정지된 침묵의 바다와 같이 고요하다. 계곡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목조 건물은 숲과 비슷한 질감으로 채색되어 있다. 새들의 지저귐과 계곡의 물소리가 없었다면 갑자기 시간이 멈춘 곳으로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서점의 출입구로 들어서니 벽에 달력이 걸려 있다. 달력은 2018년 8월부터 넘어가지 않고 있다. 무려 3년이 넘게 시간을 잡아놓은 달력은 누렇게 색이 바랬다. 안쪽으로 다가가니 기타가 한 대 비스듬히 놓여 있다. 언제부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줄은 녹이 슬고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다. 소금(素琴)의 경지에 이른 악기다.

그리고 창가에는 서점 주인인 듯한 할아버지가 유리창 너머로 낙엽이 지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 오고 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할아버지는 그저 달력처럼 기타처럼 조용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침묵을 깨면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시작될까 해서 조심조심 좁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내려가 서고로 들어섰다.

그곳은 마치 조개껍질의 무덤처럼 무수한 책이 널려 있는 책의 무덤과 같았다. 어릴 적 쓰던 교과서에서 전문 서적에 이르기까지 수만 권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책도 나이를 먹는 건지 누렇게 색이 바랜 표지는 전구의 빛을 외면한 채 등을 돌리고 책장에 꽂혀 있다. 책들은 이제 임무를 마치고 퇴역한 군인처럼 책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그저 추모객들의 눈요기와 사진의 배경으로 변해 있었다.

이 수많은 책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또 언제까지 이곳에 있게 될까? `보지 않는 책, 팔리지 않는 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고,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을 찾아오는 걸까?

사람들이 정해 놓은 용도를 다한 책의 무덤은 이제 영화 촬영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호기심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내듯' 이 산중에 널려 있는 책들은 죽어서도 생명력을 발휘하며 또 다른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서점 주인인 할아버지는 도통 말이 없으시다. 이곳에 서점을 낸 것이 20여 년 전이라고 한다. 그 오랜 세월 책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업이었을까, 즐거움이었을까, 아님 서로 지켜주는 동반자였을까?

풀벌레 소리가 새까맣게 몰려오고, 외로운 산이 “쩡쩡” 소리 내어 울고, 멀리서 별빛이 야속하리만큼 차갑게 빛날 때,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어두운 서점에 머물렀을까? 그때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곳에 과연 외로움이나 두려움이란 것이 있기나 했을까. 어쩌면 침묵의 바다에 묻혀 절대 고독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내부자'에 나오는 `모히또'를 한 병 사서 마시니, 문득 영화의 대사 한 구절이 떠올랐다. 배우 이병헌이 “모히또 가서 몰디브나 한잔할까?”라고 너스레를 떨며 억새꽃 반짝이는 산모퉁이를 막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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