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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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7.2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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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게양합시다
김 승 환 <충북민교협 회장>

토시히로 선생이 전화를 했다. 좋은 술이 있으니 한 잔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좋은 술이란 일본의 청주(淸酒) 즉 사케일 것이고, 그가 최근 일본을 다녀왔으므로 일본에서 사온 것일지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눈이 좋기만 보일 거리에 사는 그는 자상하고 겸손한 일본인이다. 건너 편 아파트의 불이 들어 왔는가 정도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나는, 그날 저녁 빈손으로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정갈한 소반의 안주와 청주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얕은 도수의 일본 청주는 깔끔하면서 깊은 맛이 있어서, 생각하면서 마시면 좋은 술이고 생각 없이 마시면 나쁜 술이다.

술을 잘 하지 못하는 토시히로씨는 나에게 연신 한국식으로 술잔을 권하는 바람에 반 주전자가 취흥을 부를 무렵 그는 조심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 그러니까 일본청주는 핵심이 아니었고, 바로 지금 그의 본심을 꺼내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혼네'本音'라고 일본인들은 여간해서는 자기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속을 알 수가 없다고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인들이 가진 문화, 즉 조심하고 겸손하며 언제나 상대방 생각을 먼저 하려는 생활문화로 보아야 한다. 수년간의 교분과 신뢰가 토시히로 선생으로 하여금 본심을 드러내게 했으니, 나 역시 허수루히 들을 바가 아니어서 짐짓 매무새를 다듬었다. 지난 제헌절 이야기였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여러 번에 걸쳐 '태극기를 게양합시다'라고 방송을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즉각 사태를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토시히로 선생이 태극기 게양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임을 알아차렸다. 난감했다. 일본문화를 체득한 한국인 부인이 무슨 말을 할까 짐작도 되었다. 지난해인가, 토시히로 선생이 아무래도 한국에서 살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일본으로 가서 살자고 할 때마다 부인의 정성과 노력으로 한국체류를 연장한 터였기에 '태'자가 나오는 순간 상황을 짐작했다. 그러니까 지난 7월 17일 화요일은 제헌절로 국경일이다. 그날은 비가 오고 있었다. 한데 아파트 스피커의 목소리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기게양을 강조했다. 동사무소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아파트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싶은 관리소장의 뜻인지 모르겠으나, 네 다섯 번에 걸쳐서 국기게양을 강조했다. 마지막에는 마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가구는 반국가적이라는 느낌을 받도록 강요하는 어조(語調)였다. 갑자기 죄의식이든 아내는 바깥을 보더니 국기를 게양한 집이 반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집은 국기를 게양하지 않았다.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전체주의(全體主義) 시절에도 비가 오는 날은 국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니까 비가 오는 제헌절날 국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은 상식으로써, 강조하거나 강요할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비가 오더라도 국기를 게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국가주의를 강제하면서 국기게양을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일본인의 느낌은 어떠했겠는가 '모든 가구는 태극기를 게양합시다, 오늘은 제헌절입니다'라고 하는 방송을 네 다섯 번 연속해서 듣는 심정이 어떻겠는가. 부인의 조국이니 그런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국가주의로 인하여 불편과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국가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한국에 이롭지 않다. 요르단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한국, 브라질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한국, 모로코 사람이 차별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한국, 폴란드 사람이 능력만 있다면 일하고 싶은 한국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지나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국가와 민족에 해(害)가 되고 있다. 무조건적인 국가주의나 감정적 민족주의는 한국인을 배타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몇백만 명의 외국인이 한국에서 사는 시대에는 개방적 국가주의와 열린 민족주의가 유리하고 이익이다. 그래서 그날 나는 다음과 같이 한마디 던지고 남은 반 주전자의 일본청주를 마저 비웠다. "내가 만약 일본에 산다면 나 또한 '일장기를 게양합시다'라고 방송할 때 무척 불편하고 또 불안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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