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과 지방소멸
수능과 지방소멸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1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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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의 장관을 본 적이 있다. 서리 맞은 강가의 풀숲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딱 이맘때였다.

그리고 다시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다.

대학에 진학해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 이 시험의 본래 목적이다. 즉,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의 여부를 살펴보는 일인데, 이 시험의 의미는 `권리를 누리거나 행사할 수 있는 자격'<다음 한국어 사전>으로 그 뜻이 치우치고 있다. 「능력」이라는 단어의 뜻에는 `정신적 기능이나 신체적 기능의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으나, 이는 대한민국의 대학입시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못한다. 지방에서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그나마 `가능성'에서 찾을 가느다란 희망마저 앗아가는 창구나 다름없다.

국가표준시험에 해당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철저하게 `능력주의'를 신봉한다. 오로지 결과만을 중시하면서 학력과 학벌의 차이를 조장하고 그 차별은 고스란히 신분제의 틀 안에 세상과 인생을 가둔다.

서울이 아닌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해마다 10%가량의 상위권 대입 수험생들이 `in-서울'의 의지를 지우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방이 고질적인 `능력주의'에서 버림받고 있다. 서울로 입성한 지방의 인적자원은 지방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기 의지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지역인재 전형이라는 강제적 타의가 겹치면서 인재와 인구의 유실을 부추기고 있으니,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가능성'의 희망이 아니라 지방소멸을 부추기는 악의 축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 제목은 <능력주의는 폭군(The Tyranny of Merit)>이다. 샌델은 거기에 `경쟁교육은 야만'이라는 명제를 더하여 숨기지 않았다.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중심의 대한민국 교육의 실체는 절대로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해(2020년) 입학한 전국 39개 의대 신입생 2977명 중 80% 이상이 월 가구소득이 920만원 이상인 소득 9,10구간에 해당한다.(한국장학재단 자료) 이 비율은 2017년 75% 수준에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부모의 학력과 재력, 사회적 지위로 쏟아 붓는 사교육의 막대한 투자가 in-서울로, 그 수도권 대학 진학을 통해 훨씬 유리한 고소득과 안정적 일자리로 이어지는 불평등의 악순환을 이미 두텁게 구축하고 있다. 부모의 재력이 자녀의 실력으로 고스란히 치환되는 대물림의 깊은 골은 그렇지 못한 청년들에게 스스로를 한계에 가두는 자기부정의 병폐를 만들고 있다.

지방은 가족주의적인 자기증식에 따른 계급과 신분의 대물림에도 편승하지 못한 채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시들어가고 있다.

올 8월 기준 충청북도의 소멸지수는 0.6. 도내에서 가장 안정적인 청주시조차도 0.956에 그치면서 소멸주의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지역의 교육 관계자들은 도내에서 매년 10%가량의 상위권 학생들이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공식적 통계는 수집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향토장학금이거나 지자체의 기숙사 제공 등 기본적인 지원 외에 이들의 귀향을 유도하는 정책은 뚜렷하지 않다.

가족주의적 조건을 토대로 심화되는 `능력주의'속에서 각자도생으로 살아남은 뒤 애향심에 호소하는 허약한 인적자원 정책으로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 지방을 구할 수 없다. `엘리트 지방'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 내가 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을 `사람'과 `함께'의 공동선으로 만드는 일은 경쟁과 성장 중심의 서울보다 지방이 훨씬 더 자신있다.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고향의 강을 떠난 `연어'들이 마음 편하게 귀향할 수 있는 물길을 만드는 노력도 절실하다. 그러나 그 길에 지방 스스로 만들어 놓은 `댐'은 없는지도 먼저 살펴볼 일이다.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는 지방 기득권의 아집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지방의 옹졸함도 두루 반성할 일이다.

연어는 고향의 강에 이르러야 비로소 더 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수험생들 모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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