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보
산보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1.11.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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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산(散)은 흩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정한 목적지 없이 가볍게 동네 고샅이나 둘레길 공원 같은 데를 잠깐 걷는 것을 산보(散步)라고 하는 듯하다. 이런 산보야 시도 때도 없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와 가장 어울리는 시기로는 늦가을을 빼놓을 수 없다. 만산홍엽에 쌓인 낙엽, 차가워진 바람, 높은 하늘 등이 산보를 부르기에 충분할 테니 말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유한준(兪漢雋)도 늦가을 산보를 즐긴 사람 중 하나였다.



산보(散步)

搾取枯枝仍作杖 (착취고지잉작장) 죽은 나뭇가지 꺾으니 바로 지팡이가 되고
藉來寒葉卽爲筵 (자래한옆즉위연) 낙엽을 빌리니 곧 대자리가 되는구나
北園高處遙遙下 (북원고처요요하) 북쪽 동산 높은 곳 멀리서 내려와
南沼晴時緩緩前 (남소청시완완전) 남쪽 연못 맑은 때 천천히 앞으로 나오네
石上寒松看盡日 (석상한송간진일) 돌 위 차가운 소나무를 종일 보노라니
天邊歸雁聽餘年 (천변귀안청여년) 하늘가 돌아가는 기러기에서 남은 해 소리를 듣네
閑來錯被傍人道 (한래착피방인도) 한가히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 잘못 들었나
不是潛郞是散仙 (불시잠랑시산선) 이 사람 떠도는 기인 잠랑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선이라 하네

시인은 늦가을 어느 날 산속에서 여기저기를 걸으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길을 걷다 보니 고사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가지를 꺾어 드니 큰스님 주장자가 부럽지 않다. 때가 때인지라 산속엔 온통 낙엽들이 널려 있는데, 이 낙엽들을 빌려 앉으니, 대청 마루 대자리에 전혀 손색이 없다. 산속의 소박한 것들이 시인에게는 세속의 귀한 것보다 더 좋아 보인다. 속세를 벗어난 시인의 자유로운 심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산속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 예사롭지 않은 면이 있다. 북쪽 동산 높은 곳 멀리서 오는 듯도 하고 남쪽 연못에서 맑은 날에 천천히 앞으로 오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 시인은 주변을 관조한다. 돌 위의 소나무는 온종일 눈 밖에 벗어난 적이 없다. 귀로는 하늘 저편을 날고 있는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이런 시인의 모습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한마디 하고 지나간다. 저 사람은 불우해서 산속을 떠도는 잠랑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신선이라고 하는 소리인데, 시인은 혹시 자기가 잘 못 들은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늦가을 길이면 어디든 좋을 것이다. 세상 잡사는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유유자적하며 걸어 보자. 그 길이 산속이라면 더 좋다. 죽은 나뭇가지 지팡이 삼고 걷다가 아무 데나 주저앉으면 땅에 쌓인 낙엽이 돗자리가 되어 준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까운 산속을 여유롭게 걷는 것은 그 자체로 힐링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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