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겹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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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윤미 노은중 교사
  • 승인 2021.11.1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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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노은중 교사
박윤미 노은중 교사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딱 그분만 앉아 계셨다. “오늘도 혼자 계시네요.”하고 밝게 큰 소리로 인사했지만, 어쩌면 한 학기 동안 단둘이 수업해야 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내가 힘들어하는 부분은 이분이 대답을 너무 빠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교재에서 어느 내용을 찾았느냐고 하면 “네”라고 바로 답하고는 교재 이쪽저쪽을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못 찾았다고 하면 기다려주거나 다가가서 알려주면 되는데, 긍정의 답을 하시는 분에게 매번 확인하기도 민망한 일이다. 간혹 개인적 경험을 길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책상 아래로 핸드폰을 보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지난 시간에도 단둘이 수업했는데, 내 설명의 모든 문장 다음에 “네, 네”라고 답하면서 책상 아래로는 핸드폰을 보는 것이었다. 잠깐이겠지 하며 참다가, 결국 나는 “무슨 바쁜 일 있으세요?” 하며 다가갔다. 수업과 관련된 사진을 찾아보는 중이라는 답변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주일에 한 시간, 얼마 전부터 나는 특별한 학생들을 만난다. 중학교 과학 과정을 가르치는데, 보통 한 학기의 학습으로 검정고시 시험에 통과하고 고등학생이 되어 옆 교실로 옮겨간다. 합격은 축하할 일이기도 하고 아쉬운 이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 이분은 진급하지 못했다. 신입 중학생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게는 일주일에 한 시간이지만, 학생들은 매일 오전에도 오후에도 등교하여 공부한다. 자녀들 뒷바라지를 끝내고서야 자신의 배움을 시작한 분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주변에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자녀들에게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공부하는 기쁨이 서서히 커지고 부끄러움이 점차 자부심으로 변해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학생들은 연륜이 많아 속도는 좀 느리지만 경험에 비추어 이해하고 다른 현상에도 곧 적용한다. 무엇보다 성실하다. TV를 보면서도 거리를 지나면서도 가만히 있다가도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내용이 생각난다고, 이제야 이치를 알게 되었다고, 이제는 주변을 예사로 보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실 때는 가슴 깊은 곳까지 감동이다. 배움의 면에서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우리의 삶을 거꾸로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요즘 우리는 지구에 대해, 지각을 이루는 암석의 종류, 화산과 지진에 관해 공부하고 있다. 학생이 더 올 거라는 기대를 버리고 내 목소리는 예전처럼 커지고 경쾌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에도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차마 그녀의 이야기를 끊고 암석의 종류가 무엇인지 공부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에서 사진을 한참 찾는 것도 기다렸다. 사진에는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옆쪽으로 길게 그어진 암 투병과 심장 수술의 흔적이 있었다. 그동안 들은 인생사의 일부일 뿐인 두 줄의 큰 상처는 고작 1년도 안 된 일이다.

“정말 최근의 일이네요. 아직도 회복 중이신 거잖아요. 수술 후에는 집중력도 낮아진다고 하는데 공부하기 정말 힘드셨겠어요. 더구나 그렇게 여러 번 큰 수술을 하시고도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 나오시다니, 정말 대단하셔요.”

이분은 특히 여행을 좋아해서 수업과 관계된 예가 풍부하고 기억력이 좋아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백두산 화산분출에 대해 배울 때는 북한 여행을 하게 된 사연까지 자세히 들었다. 커다란 바위가 모래알이 되고 흙이 되었다가 다시 암석이 되듯이 우리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 돌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했다. 암석의 순환을 이렇게 깊이까지 공부한 건 처음이었다.

그분은 변함이 없지만, 내게는 큰 변화가 생겼다. 교실 문을 열면서 오늘은 함께 어떤 공부를 하게 될까 기대하는 것이다. 아니 그녀의 눈빛에도 목소리에도 분명 변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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