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가로수 길
느티나무 가로수 길
  • 박영자 수필가
  • 승인 2021.11.1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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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영자 수필가
박영자 수필가

 

산책을 나가려다 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아침이라 그런지 기온이 뚝 떨어져 한기가 느껴진다. 하긴 내일모레가 겨울로 접어든다는 입동(立冬)이니 이름값을 톡톡히 할 모양이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아파트 정문으로 나갔다. 어느새 금빛 햇살이 퍼지고 하늘은 끝 간데없이 높고 푸르다.

아파트 정문 앞 큰길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추어지고 아! 하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큰길 양쪽으로 가을이 환하게 펼쳐져 있다. 느티나무 가로수들이 여름내 입고 있던 짙푸른 녹색 옷을 저마다 화려한 옷으로 바꾸어 입고 치장하고 나왔으니 그 모습이 장관이다. 빨강, 꽃자주, 연노랑, 갈색, 초록, 연두. 황금색…. 온갖 색채의 향연이다. 한껏 치장한 색채의 마술이 황홀하다. 설악산 단풍이 곱다고, 내장산 단풍이 화려하다고 달려들 가지만 나는 바로 집 앞에서 느티나무 가로수들의 가을잔치에 초대되었다.

세상의 어떤 화가인들 저리도 곱고 화려한 색채를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난봄에 연두색 싹을 틔워 그 청순함이 마음을 빼앗더니 이제 곱게 화장한 모습으로 또 한 번 눈길을 사로잡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로수 길이 미인대회라도 여는 듯 같은 길에 줄 서 있는데도 같은 색깔의 나무가 하나도 없이 저마다의 개성들을 나타내고 있다.

청명한 햇살을 받아 색은 더 곱고 현란하다. 사람의 노년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는 걸까. 보고 또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중후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여기뿐인가. 이맘때면 온 나라가 만산홍엽에 금수강산이 된다. 우리의 가을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다고 하니 이 계절을 한껏 가슴에 들여 놓을 일이다.

유난히 붉은 낙엽 한 장을 주워들었다. 섬세한 잎맥을 타고 흐르는 감촉이 아직은 살아있다. 비바람을 이겨냈고, 올여름의 더위는 얼마나 혹독했던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잎을 거느리며 모든 고난을 겪어 내고 저렇듯 당당한 모습으로 도열해 있는 나무들의 위용이 대견스럽다.

느티나무는 장수목(長樹木)으로 천 년을 사는 나무다. 넓은 품속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아늑한 품 안은 뙤약볕 농사에 지친 농사꾼들의 안식처이며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하는 회의 장소요, 광장이 되기도 한다. 노인들의 쉼터로, 아이들의 놀이터로 늘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함께 살아온 정겨운 나무이기에 `나무의 황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당산나무로 신성시하여 마을의 안녕을 빌었으니 어느 낯선 동네입구에 고목이 된 느티나무를 보면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이 찬란한 느티나무들의 축제도 이제 가을비 한 축 훑고 지나가면 어느새 낙엽 되어 수북이 쌓이고 바람에 뒹구는 모습은 또 얼마나 황량할 것인가. 하지만 내년 봄의 연둣빛 새싹의 부활이 있기에 절망은 아니다.

곱게 물들인 느티나무 가로수를 눈이시도록 바라보며 내 마음도 저렇게 곱게 채색되었으면 싶다. 이 가로수들이 노거수가 되어 느티나무 터널을 이룬 날, 삼삼오오 그 나무 밑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정겹고 화려한 풍경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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