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아! 고맙다
가을아! 고맙다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1.11.1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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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밤부터 내린 비로 그 곱던 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절정으로 치달아 화려하기 그지없던 단풍들이 떨어지는 빗물에 속절없이 지고 뜰 안에서 여왕 노릇을 하던 황국도, 적국도 이제는 고고한 자태를 잃어버리고 흐물흐물 색이 바랬다.

출근하는 길목의 도로변으로는 간밤에 떨어진 은행잎들로 어수선하다. 새벽부터 쓸기 시작했는지 긁어놓은 낙엽들이 허드레 자루에 담겨져 길가에 쌓이고 있다. 송풍기가 쉴새 없이 돌아가고 곳곳에 빗자루를 들고 잎을 쓸어 담느라 분주한 청소하시는 분들의 손길이 더없이 바쁘다. 온통 울긋불긋 황금물결을 이룬 가을 단풍에 너도나도 눈이 즐겁던 때가 며칠 전 즈음이었는데 어느새 쓰레기로 전락해 애물단지가 되었다니 마음속으로 쌩하니 바람이 인다.

근무하는 유치원 뜨락에도 단풍나무가 휑하니 나뭇가지를 드러냈다. 밤새 비와 바람 속에 고군분투하더니 결국 모든 잎을 떨궈 나무 아래로 눈처럼 소복이 내려앉았다. 지난봄에 초록잎을 달기 시작할 때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고 선선한 가을로 접어들면서 한 잎 두 잎 불그스레 아이의 뺨처럼 이파리에 물을 들일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며 가며 쳐다보게 되었다.

급기야 지난 한 달 가까이 붉은 잎을 왕성히 달고 단풍나무는 당당히 뜰 안의 대표가 되었다. 아이를 데리러 오는 어떤 엄마는 나무를 배경으로 아이와 함께 연신 사진을 찍고 담 너머 지나다니는 행인들도 기웃기웃 탄성을 질렀다. 짧은 계절의 시간 속에 머무는 동안 가을의 모든 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고 잠시 쉬어가게 해 주었으며 돌아올 다음해를 기다리게 해 주었다.

나이를 먹는 건지 올해는 전에 없이 울긋불긋 단풍이 자주 눈이 들어와 이곳저곳 구경을 다녔다. 집으로부터 차로 반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은행나무 가로숫길도 그리 걸었다. 해마다 근처 저수지 제방 길을 따라 물 위에 비친 은행나무 그림자를 따라 걸으면 열두 폭 병풍을 펼쳐 놓은 듯 풍경이 그만이라는 지인의 말이 정말 딱 맞았다. 가을 풍경을 만끽하려는 나와 같은 마음의 사람들로 다소 혼잡했지만 노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 은행나무 가로숫길을 유유자적 걷다 보니 이래저래 코로나로 답답했던 일상이 조금은 풀리기도 했다.

유치원 아이들을 데리고는 근처 자연휴양림으로 가을 숲 체험도 다녀왔다. 휴양림 입구에서부터 화려한 빛깔로 단풍이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중국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서리에 물든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라며 「산행(山行)」이라는 시에서 단풍의 아름다움을 읊던 배경이 아마도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이들과 함께 갈잎을 주워 하늘로 날려보고 은행잎을 모아 꽃다발도 만들어보면서 오랜만에 철없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좋았다.

입동(立冬)이 지났으니 동면에 들 동물들이 땅을 파고 속으로 들어 잠잘 채비를 하듯 겨울은 점점 거리를 좁혀 세상의 온갖 잎을 데려갈 것이다. 차가운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계절이 돌아오면 또다시 잎을 키우겠지만 내년 봄의 그 잎이 올해 피었던 그 잎은 아닐 것이다.

짧은 계절 내내 참 고마웠다. 알록달록 저마다의 색으로 눈을 즐겁게 해 준 올해의 낙엽들이여! 그리고 가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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