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인 철학적 사변
비현실적인 철학적 사변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1.11.10 1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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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우리는 나(우리) 이외의 것을 다 아울러 다른 것(他者)이라고 한다. 나를 기점으로 생각해보면 타자에는 배우자, 자식, 부모, 친구, 동료, 적, 원수, 개, 사슴, 뱀, 고양이, 까치, 고래, 멸치 등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타자에는 가장 가까운(親) 사람부터 가장 먼(疎) 사람까지 다 포함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아이들과 불구대천의 원수 같은 인간들을 하나의 범주 안에 묶어 놓은 것이 철학적 타자의 개념이다. 그게 하나의 범주 안에 묶일 수 있을까? 친소(親疏), 호오(好惡)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 가능할까?

처음 사랑할 때를 생각해보라. 얼마나 가슴이 떨리는가? 온 세상이 다 달라 보이고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달달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된다. 모함을 해가면서 나를 헐뜯고 해코지를 하려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떠올려보자.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정도로 꼴 보기 싫고, 생각하기조차 싫다. 친소(親疏)에 따라 호오(好惡)를 느끼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걸 같은 부류로 놔야 한다고? 쉽지 않은 일이다. 비현실적이다.

철학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내가 먼저인가 타자가 먼저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독불장군은 없다.'라는 말은 타자가 있어야 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있어야 세상이 있지.'라는 말은 내가 타자에 우선한다는 말이다. 나와 타자 중 어떤 것이 먼저냐의 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는다. `타자가 있어야 내가 있을 수 있다'와 `내가 있어야 타자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명들은 다 같이 차고 넘친다.

거두절미하고 내가 없다면 타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해보자. 배우자는 나의 반려자이지 다른 사람의 짝이 아니다. 자식은? 나의 자식이지, 원수는? 내가 미워하는 놈이지. 나와 무관하게 타자가 있다고? 그건 확인할 수 없다. 내가 보거나 생각해야 타자가 있는 거지. 내가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타자? 그건 확인할 수 없다. 보고 생각하는 내가 있어야 타자가 있는 거다. 곧 자타(自他) 구분은 내가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타자는 내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럼 나는? 나는 있는 건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인간들은 내가 생활(활동)하고 그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진다. 내가 전제되지 않으면 사회의 모든 법규가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내가 있는 건가?'라는 질문은 현실(타자와 얽힌) 생활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이를 현실 초월적인(사변적)(speculative) 질문이라고 한다.

철학적으로 따져보면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기독교에서의 `나(자존적 주체)'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탄의 뿌리로서 선악과를 따먹게 한다. 곧 죄의 근원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諸法無我)고 한다. 나는 원래 없는 것인데 허구적인 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허구적이라고? 그게 무슨 의미지? 타자는 나 이후에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허구적이라고? 그럼 타자는? 물론 허구적이다. 그럼 타자와 나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것도 허구다. 이렇다면 세상을 살면서 일희일비하는 모든 것들에 목을 맬 이유가 없게 된다. 사랑과 분노의 무차별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도 헛되고 미움도 헛되고 슬픔도 기쁨도 다 헛되다.

여기가 끝일까? 아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어떻게 될까?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도 헛되다. 타고 남은 재처럼 다 타서 더 이상 탈 것이 없거나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게 사는 걸까? 모두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비현실적 사변이다.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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