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카인드, 보통 사람들의 선량함
휴먼 카인드, 보통 사람들의 선량함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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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요소수'가 나라의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소재·부품·장비, `소부장'의 위기를 겨우겨우 넘기고 있는데, 이번에는 물류대란이 예고되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다.

내연기관 자동차 등 디젤을 연료로 사용하는 차량의 배기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요소수는 깨끗한 환경을 원하는 인간의 고육지책이다.

값싸고 구하기 편한 화석연료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면서 성장일변도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던 인간이 대기오염과 미세먼지라는 당장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강제한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런 순간의 모면이 당장 화물 차량의 운송 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그 여파로 물류배송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으로 예고되면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고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 그로 인한 호주의 대중국 석탄수출 중단, 그리고 석탄을 통해 추출되는 요소수의 공급 중단이 한국에서의 화물차 시동을 멈추게 하는 대강의 줄거리이다.

환경오염이 당연하게 경고되는데도 디젤 내연기관을 고집했던 것은 자본에 대한 탐욕이다. 국경을 넘어 가난한 한국의 화물차 기사들을 괴롭히는 것은 열강의 패권 다툼에서 비롯된 일이며, 필수재인 요소수마저 대처하지 못하는 `나라'의 `기본'부족은 여전하다.

이 같은 `모든 것의 탐욕'이거나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에 대한 고민 부족과 나라의 허약한 `기본'을 거듭 제기해야 함은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당대의 욕심을 위해 만든 제도와 관계에서 비롯된 위기의 근본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선량한 보통의 사람들에 의해 그 극복을 위한 노력이 실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람들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 알아주거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소중한 요소수를 살금살금 들고 와 소방서 앞에, 그리고 보건소이거나 구급차 앞에 몰래 내려놓고 가는 선량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여기'에서 요소수를 선뜻 내어놓는 일은 나는 멈추어도 괜찮다는 뜻이다. 내가 멈추는 대신 절대로 멈추거나 지체해서는 안 될 소중한 생명의 이어짐을 간절히 염원하는 희망의 연대에 해당한다.

요소수가 부족해 화물차가 멈추게 되면 당장 소방차와 구급차 등 생명보호에 필수적인 차량 또한 움직이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들의 슬기로움은 어디에서 발현되는 것인가. 코로나19의 물리(사회)적 거리두기로 자영업자의 위기가 심각해지기 시작할 때 `착한 임대료'라는 이름으로 제도와 정책에 앞서 집세를 깎아주거나 연기해주는 선량함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혹독한 무더위와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이라도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리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헌신을 멈추지 않는 의료진의 위대한 희생은 얼마나 숭고하고 순수한 것인가.

이처럼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선량함은 탐욕으로 억제되고 권력으로 통제되면서 감춰진 인간 본성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로 충분하다.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휴먼 카인드>에서 인간의 눈은 다른 동물(특히 영장류)들과는 달리 흰자위를 갖고 있는 특징이 있다. 덕분에 인간은 상대방의 눈을 보며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 수 있다. 그 시선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서로가 관심을 갖는 대상을 알 수 있으며, 그 눈길에서 신뢰를 토대로 하는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그 눈빛으로 서로에게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선량함의 비밀을 스스럼없이 공개하고 공유한다. “(인간이) 얼굴을 붉히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적 행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신뢰를 증진시키고 협동을 가능케 한다.”는 브레흐만의 부끄러움에 대한 긍정에서 `나라'와 `제도'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위기마다 어김없이 거듭되는 보통 사람의 선행은 넉넉하게 가슴 뜨거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보통 사람의 선량함에 의지해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가'에 이르는 분노는 까닭없는 일인가.

5년 전, 그 해 11월 촛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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