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극복의 희망을 품은 곳 `청주망선루'
국난극복의 희망을 품은 곳 `청주망선루'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1.11.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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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청주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중앙공원에 가면 우리나라 누각 건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이 있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된`망선루'다.

고려시대 청주 관아의 객사 동쪽에 있던 누각건물로서 청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보이는 이 건물은 고려시대 과거를 치르고 합격자를 게시하였던 유서깊은 누정이다. 누정(亭)이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을 말한다.

그리고 청주를 `교육문화도시'로 명명할 때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유적이 여럿이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건물이 바로 망선루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1920년대는 보복성 문화정책을 시행했다. 과거 임진왜란 때 왜군의 최정예부대가 지키던 청주성을 의병들에 의해 가장 먼저 빼앗겼던 아픔(?)을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제는 그 보복으로 가장 먼저 청주 상징이었던 청주읍성을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청주지역의 역사적인 유적들을 없애는 작업을 착착 진행했는데, 다음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무심천의 돌다리(남석교)를 땅에 묻어버리고, 망선루를 헐어버리는 등 역사의 만행을 저질렀다.

청주의 긍지와 같았던 이 건물이 바로 정면 5칸, 측면 3칸(18.84m×8.37m)의 2층 누정 밍선루다. 이 망선루가 1922년 일제의 무덕전 신축으로 헐리게 되자 청주청년회 회장이던 김태희를 중심으로 망선루 보존운동을 전개하여 1923년 제일교회(당시 청주읍교회)에 옮겨서 건축했다. 이 사건이 일제강점기에 청주시민들이 일으킨 최초의 시민운동이었다. 이전된 망선루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청남학교, 상당 유치원 등 민족교육운동과 한글강습, 각종 집회 및 강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비롯한 많은 민족운동과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 민족학교로 청주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후 망선루는 세광고등학교 학교 건물로도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 창립한 청주YMCA의 회관으로도 이용되었고, 청주 제일교회의 교육관으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었다. 이후 근래에 들어 망선루의 복원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9년 10월 이 건물을 해체하여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와 2000년 12월 원형을 고증하여 복원하였다.

망선루는 본래 취경루(娶景樓)라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관아의 부속 누정(회의 및 연회 장소)으로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다.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1361) 홍건족의 침입 때 왕이 안동으로 파천하였다가 그 해 11월 청주에서 수개월 피신하고,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기뻐하여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를 행하고 합격자의 방을 이곳에 붙였다고 한다. 국난극복을 기념해 인재를 뽑고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온 나라에 퍼트린 것이다. 그 후 조선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가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주말에는 가을 단풍과 함께 청주시내 투어를 해야겠다. 망선루기념비도 찾아보고 망선루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제일교회도 가보고, 오랜만에 육거리시장에서 쇼핑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현재 망선루가 옮겨져 복원되어 있는 중앙공원을 답사하며 코로나19라는 국난극복의 기도를 해야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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