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식물들이 먼저 안다
깊어가는 가을 식물들이 먼저 안다
  • 우래제 전 중등교사
  • 승인 2021.11.03 20: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과학이야기
우래제 전 중등교사
우래제 전 중등교사

 

비닐하우스 농사 때문에 제철의 의미가 없긴 하지만 보통 시금치는 봄이나 여름철 채소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겨울 시금치가 제일 좋다. 그것도 노지에서 모진 찬바람 이겨낸 시금치가 맛이 최고다. 추위에 잎이 얼어 다소 손해를 보긴 하지만 달달한 맛이 아주 좋다. 게다가 보통 시금치는 잎만 먹는데 겨울 노지 시금치는 뿌리까지 먹을 수 있어 더욱 좋다. 찬바람 이겨내기 위해 잎과 뿌리의 농도를 높인 덕에 더욱 단맛을 내기 때문이다.

올해도 달달한 겨울 시금치를 기대하며 좀 늦은 듯 월동용 시금치 씨를 뿌렸다. 시금치가 싹이 터서 삐죽이 올라올 때쯤 온갖 잡초들도 경쟁하듯 올라온다. 작은 잡초를 핀셋으로 뽑듯이 하나하나 뽑다 보니 이게 웬일인가? 5㎝도 되지 않은 작은 것들이 꽃을 피웠다. 주름잎, 방동사니, 게다가 달랑 꽃 한 송이 달고 있는 까마중의 앙증맞은 모습은 기절할 정도다.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도 작고 어린것들이 꽃을 피웠을까?

식물의 꽃 피는 시기를 결정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낮의 길이와 온도의 영향이다. 낮의 길이에 따라 영향을 받는 현상을 광주기성이라고 하는데,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면서 꽃이 피는 식물을 장일식물,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밤이 길어지면 꽃이 피는 식물을 단일 식물이라 한다. 그래서 개나리, 벚꽃나무, 사과나무와 복숭아, 시금치, 상추, 토끼풀 등은 낮이 길어지는 봄과 초여름에 피는 장일식물이다. 반대로 도꼬마리, 분꽃, 나팔꽃, 코스모스, 국화 등은 낮이 짧아지는 늦여름에서 가을에 피는 단일식물이다. 이렇게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짧아지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은 피토크롬(phytochrome)이라는 색소 단백질 덕분이다. 이 색소 단백질은 밤의 길이에 따라 활성화되기도 하고 불활성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면 밤의 길이가 식물의 개화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식물의 특성을 이용하여 봄에도 국화꽃을 피울 수 있다.

다음으로 꽃의 개화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온도다. 보통 봄꽃은 밤이 되면 꽃을 오므린다. 그러나 달맞이꽃, 분꽃, 노랑원추리는 밤에만 꽃이 핀다. 쇠비름이나 채송화는 맑은 날 10시쯤 피어 2시쯤 오므린다. 이러한 것들은 온도에 의한 영향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온도를 어떻게 알아낼까?

과학자들은 온도에 따라 꽃을 피우게 하는 호르몬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플로리겐(florigen)이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7년 플로리겐의 정체가 FT 단백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올해 9월 우리나라 연구진이 개화 유도 호르몬인 플로리겐이 잎의 세포 안에서 온도 변화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처음으로 밝혀낸 논문이 사이언스(Science)에 실렸다. “이번 연구 덕분에 지구 온난화에 따른 생태 변화에 대응하는 방안 마련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대기 온도의 변화에 대응해 개화시기를 조절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고, 온도 변화에 따른 작물의 생산성 하락을 막는 데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참으로 어려운 연구 성과를 이뤄냈다.

미처 크지도 못한 아주 작은놈들이 서둘러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은 이제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단 한 톨의 씨앗이라도 만들어 훗날을 기약해야 하는 생존전략이 처절하기만 하다. 마치 너는 나처럼 필사적으로 처절하게 살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듯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