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냥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1.10.2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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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멍하니 하늘만 바라봐도 좋은 계절. 살갗을 스치는 맑은 바람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 계절에는 꼭 어떤 목적이나 장소를 정하지 않고 그냥 떠나고 싶다. 가다가 눈을 잡아끄는 풍경이 있으면 그 방향으로 가보는 거다. 이 가을 한 철은 그냥 그렇게 떠나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종일 그냥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냥 떠나고 싶고, 그냥 쓸쓸하고, 그냥 눈물이 나고, 커피도 마시고 싶고, 그냥. 그냥. 그냥... 어떤 노배우는 우리말 중에 제일 좋아하는 말이 아름다움이란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계절, 사회, 시간, 세상을 아름답게 보면 아름답게 살아진다는 노배우의 삶이 아름답다. 가을과 아름다움이라는 말도 잘 어울리지만 그냥이란 말도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무심한 듯 쓰는 그냥. 그냥 가자. 그냥 하자. 그냥 넘어가자. 그냥 와라. 그냥 먹자 등등 모든 말 앞에 그냥이라는 부사를 넣으면 한 문장이 성립된다.

그냥의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 작용을 가하지 않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그대로, 또는 아무 뜻이나 조건 없이, 그대로 줄곧 이다. 나는 사전적인 의미를 살짝 부인하고 싶다. 설명하기 구차스럽거나 복잡하거나 귀찮거나 모호할 때 하는 속말 또는 대답이 그냥이다. 작용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기 싫을 때는 그냥을 길게. 또는 방점을 찍듯 가볍게 그냥이다. 자연과의 교감은 그야말로 그냥 좋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조건이나 작용 없이 그냥이 성립될까 생각해 본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면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어도 분위기상 차마 말은 못하고 마음에 걸려 잘 삭아지지 않고 치밀어오를 때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평온하나 내면에서 한 번 들이 받어와 참자의 갈등을 일으킬 때 “그래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스스로를 다독인다. 이 말을 책에서 본 건지 드라마 대사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잊혀 지지 않는 한 문장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틀렸어 불행은 그냥 불행인 거야”이다. 애써 불행을 위로하려고 해도 불행은 그냥 불행인 거다. 다행은 타인이 보는 거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그냥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는 자식들의 말은 그냥이 그냥 아니다. 상태의 변화 없는 게 아니다. 내면에 속상하고, 억울하고, 치사하고, 비참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절규다. 그냥 엄마 목소리 듣고 싶다는 것은 지금 아파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어미가 어찌 모르랴.

이 계절엔 그냥 떠나 보고 싶다는 바램은 아마 분주하게 살아온 봄과 여름이 비켜섰고 마당에 지악스럽게 나오던 풀도 주춤거리고 여유가 생겼다. 뒤돌아보면 봄엔 철이 없었고 여름엔 숲을 헤쳐 나오느라 숲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나 앉을 자리 차지하는 것도 버거웠다.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비로소 내 걸어온 길이 보인다. 삶에는 그냥이 없다. 다 이유가 있는 그냥이다. 가을을 살다 보니 해 질 녘 하나 둘 비워져 나가는 빈 논을 바라보다 울컥해질 때가 있다. 그러니 그냥 떠나보고 싶은 거다. 세찬 바람에도 꿋꿋이 버티고 견디며 살아온,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애쓰며 살아냈다. 종종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할 때가 있다.

“난 네가 그냥 좋아. 이유도 없이 그냥 좋아” 입속에서 흥얼거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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