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처방을 기다리며
책 처방을 기다리며
  •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21.10.2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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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뚜우우.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둔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다.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느라 기진맥진인데 창문 밖이 훤한 걸 보니 날이 샌 모양이다. 국민비서가 몸은 어떠냐고 묻는다. 덤덤한 문장이지만 살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살갑다.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 후 몸살을 피해 가지 못했다. 체력장 점수가 입시에 들어가던 시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윗몸일으키기와 매달리기, 오래달리기를 해낸 다음 날 상태랄까? 오랜 기억을 소환할 만큼 강도 높은 통증임에 분명하다.

정신을 차려 주섬주섬 집안을 치우고는 겨울옷 서랍을 뒤적거렸다. 단풍을 삼킨 64년 만의 가을 한파라고 한다. 내 평생 가장 추운 가을날이라니 살짝 걱정되지만 그냥 집에 있는 것보다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 운동복 위에 패딩 조끼를 덧입고 그 위에 두툼한 겉옷을 껴입었다. 이 정도면 가을 한파가 아니라 겨울 한파도 걱정 없다. 지하 주차장을 지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햇살만큼 눈부시다. 일기예보대로 맵싸한 공기가 뺨을 스치며 정신이 번쩍 든다. 아파트 화단을 따라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지금 집으로 이사한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아직 마을이 낯설다. 이사 오기 전 마을은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대학을 가고 군에 입대할 때까지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다. 외동으로 자란 아들이 문만 열고 나서면 친구들이 있는 마을이기에 이사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지 않은 이사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이사 갈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도서관이 있어서였다. 막상 이사를 하고 나서는 바쁜 일정 핑계로 발걸음을 못하다가 드디어 도서관 나들이를 나선다.

가로수 도서관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다. 연한 색 목재 책장에 책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는 것이 좋다. 자료실 서가에 기대서서 책을 들춰보다 창문 너머 가을 하늘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좋다. 널찍한 공간 덕분인지 낯설지만 편안하다.

처음 온 티를 팍팍 내며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니 잔뜩 껴입은 옷이 답답하다. 2층 북카페에서 차가운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복도에 놓인 우체통에 시선이 간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한 사람들이 `책 처방 엽서'를 보내면 책을 추천해 주는 우체통이다.

어릴 때 나는 책 욕심이 많았다. 친구 집이나 친척 집에 가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음식을 먹기보다 그 집에 있는 책을 읽느라 정신이 팔렸었다. 책에 유난스러운 딸에게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은 고전소설이나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주는 것이었다. 전집으로 사야 싸게 살 수 있었으니까.

어린 시절 전집에 있는 책을 순서대로 읽었다면 지금은 필요에 의해서만 책을 읽는다. 일하는 데 필요한 책만 읽는 독서 편식에 비하면 차라리 전집을 몽땅 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을 아는 것처럼 우체통 옆에 엽서가 놓여 있다. 도톰한 엽서에 편식하는 나를 위한 책 처방 요청을 또박또박 써본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아직은 낯선 마을, 아직도 낯선 코로나19 속에서 책 한 권의 처방이 일상 회복의 치유가 될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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