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그리고 일상
연탄, 그리고 일상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2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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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손톱 밑으로 파고든 시커먼 탄가루는 사흘이 지나서야 빠졌다.

며칠 전 내덕1동 주민들과 함께 `연탄봉사활동'을 했다. 내 일상의 에너지원에서 멀어진 연탄을 만져본 것이 어언 이십 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게다가 `봉사활동'이라는 이름으로나마 연탄을 나르던 일도 족히 십 년은 넘은 듯 가물가물하다.

세 시간 가까이 연탄을 나르는 일은 처음 해보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고, `봉사'로 포장된 내 몸에 `노동'의 익숙함은 기대할 수 없다.

빨갛게 코팅된 목장갑을 끼고, 옷에 탄가루가 묻을까 봐 우비도 갖춰 입었지만 탄가루의 습격을 완벽하게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탄은 이날 어느 주민의 창고에서 묵혀 있던 것을 꺼내 다른 주민의 빈 창고로 옮겨졌다. 도시가스 공급으로 더 이상 연탄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현대화(?)의 혜택이 아직 그렇지 못한 가난의 자리를 채우는 것인데, 기꺼이 연탄을 기부한 평범한 이웃의 뜨거움이 가슴을 덥힌다.

연탄을 나르는 일은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가릴 것 없이, 몸과 마음이 후끈한 일이다.

기꺼이 연탄을 내놓은 한쪽에는 `비움'의 평화가 있으며, 그 연탄이 옮겨지는 빈 창고와 거기 사는 사람에게는 `채움'의 넉넉함과 한 겨울에도 춥지 않을 `안심'이 있다.

묵은 연탄으로 가득 차있던 창고에서 연탄을 꺼내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손에서 손으로 이어받으며 트럭에 싣는 일은 `노동'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들에겐 `채움'이다. 그 트럭에서 어느 가난하고 늙은 몸이 홀로 사는 처량한 집 빈 창고에 연탄을 옮기는 일은 `비움'이다.

그 `채움'과 `비움'이 출발지와 도착지, 기부하는 사람과 그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넉넉한 `내려놓음'과 뜨거운 `쌓임'으로 승화된다.

연탄봉사의 `노동'은 트럭에 쌓는 일보다 내려놓는 일이 더 빠르다. 사람의 욕심도 마찬가지여서 악착같이 재물을 챙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고단함은 `선물'을 작정한 큰마음이면 오히려 더 커다란 비움의 넉넉함으로 빨라지는 이치와 같다.

이날 연탄봉사의 노동요는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였다. 언젠가 <수요단상>에서 읽었다며 내덕1동 동장님이 읊어 줄 것을 요청하는 바람에 내가 선창하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노동'을 함께하던 주민들이 화답한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빨갛게 코팅된 목장갑을 끼고 긴 비옷까지 겹쳐 입었는데도 연탄가루가 손과 팔목, 그리고 얼굴과 콧구멍에도 흔적으로 남았다.

씻고 또 씻었는데도 손톱 밑에, 그리고 목덜미와 얼굴, 콧구멍은 물론 목구멍에서도 까만 재가 묻어 나온다.

아! 봉사를 빙자한 겨우 세 시간의 `노동'에도 진저리를 칠 만큼 시커먼 탄가루가 거북스러운데 깊은 땅속 탄광에서 평생 석탄을 캐며 살았을 광부의 검은 삶은 얼마나 처절했을까.

노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책꽂이에서 오래된 책을 찾아 마음이 그나마 따듯했던 시절의 밑줄을 읽는다.

「연탄. 나를 전부라도 태워, 남의 시린 손 녹여 줄 따스한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움으로 충혈된 눈 파랗게 비비며, 님의 추운 겨울을 지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님께서 걸어가실 가파른 길 위에 누워, 눈보다 더 하얀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이철환. 연탄길1 中> 이날의 `연탄'앞에서 `화석연료'이거나 `탄소중립', `기후위기'같은 말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연탄`은 2년 넘는 동안 한없이 추락했던 코로나19의 긴 한숨을 뚫고 이제 일상으로 귀환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씩 약속되는 희망에게 묻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비울 것은 무엇이고, 채울 것은 무엇이며, 더불어 나누고 보탤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연탄만큼 아낌없이 돌아갈 준비는 하고 있는 것인지.

`연탄'에는 아직 사람이 많이 남아있다. `연탄'같은 마음이 우리가 돌아갈 일상의 맨 앞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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