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
북소리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1.10.2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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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이은일 수필가

 

온통 갈대밭이다. 지프 트럭을 타고 구불구불 가파른 비탈길을 덜컹거리며 20분쯤 올라가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넓은 언덕이 나타났다. 소나무 몇 그루 서 있는 언덕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무성한 갈대만이 햇빛을 받아 윤슬처럼 반짝이고 있다. 갈대밭 위로 커다란 카펫을 깔아놓은 넓고 평평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저기가 출발지점인가 보다.

산 아래에서 갈아입고 온 항공 점프 슈트 위에 안전 장구를 착용하고 플라스틱 의자에 달린 안전띠를 단단히 채웠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아들의 글라이더가 펴지며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다음은 내 차례다. 더 빠르게 뛰는 심장, 괜한 호기를 부렸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얼마나 해보고 싶던 패러글라이딩인가! 이내 걱정을 밀쳐내고 가슴 가득 차오르는 설렘으로 기대 충만이다.

친정을 오가는 길에 중미산을 넘을 때면 항상 하늘에 떠다니는 글라이더들을 보면서 부러워했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은 어떨까? 나도 한번 타 보고 싶다!' 지난 추석에도 그랬다. 그런데 며칠 전 아들한테서 주말에 패러글라이딩 가자는 전화가 왔다. 저야 친구들과 가도 되는데 엄마는 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며 함께 가잔다. 어느새 커서 엄마를 챙기니 고맙고 기특했다. 어쨌거나 덕분에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됐다.

사실 요즘 들어 부쩍 아들이 마음에 든다. 속 썩였던 시절도 있었나 싶게 하는 짓마다 의젓하고 믿음직스럽다. 고등학교 시절에 몇 번 예상범위를 넘어서는 일탈로 엄마를 걱정시키더니, 졸업 후 진로를 농사로 결정했을 때도 뜬구름 잡는 식의 막연한 계획만 늘어놓아 영 못 미더웠었다. 그런데 올해 농업기술원에서 실습하면서부터 확실히 철이 들었다. 직접 농가를 다녀 보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역시 사람은 다 자기만의 때가 있는 거였다.

《월든》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누군가 동료들과 박자를 맞추지 않고 다르게 걷는다면 그는 분명 고수鼓手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디 먼 곳에서 들려오는 다른 가락이더라도 그만의 북소리에 맞추어 걷도록 내버려 두어라. 누구나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처럼 빨리 자라야 할 이유는 없다.” 세상 모든 만물이 자기만의 북소리를 따라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수탉이 대낮에 울어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다.

드디어 출발선에 섰다. 출렁, 뒤로 당겨지는 힘을 버티며 한발 앞으로 나가니 두 발이 공중에 뜬다. 그리고 한참 동안 모든 게 정지된 듯 사방이 고요했다. 손톱만큼의 무게감도 흔들림도 없이 허공에 떠서 편안한 묘한 느낌. 무섭기는커녕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오히려 신기했다.

그다음 천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풍경은 그야말로 벅찬 감동 자체였다. 멀리 남한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뒤로 갈수록 하늘의 색과 비슷해지는 산봉우리가 먼 데까지 겹겹이 선명하다. 구름 끝에 걸린 해는 시나브로 붉은 물을 풀어내고 발아래 세상은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다. 나는 노을빛 하늘과 몽글몽글한 단풍 숲 사이 어디쯤을 날았다. 분명 꿈은 아닌데 꿈이 아니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어느덧 날개를 접을 시간이 된 것 같다. 이미 아들은 먼저 내려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고 나도 배운 대로 두 다리를 들고 안전하게 착지했다. 비행 끝. `두둥 두둥' 꿈을 향한 북소리가 다시 심장을 타고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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