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답고 아름다운 이야기
  •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1.10.25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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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소나무 사이로 한 줄금 갈바람이 인다. 고귀한 자태로 늠름하게 서서 발걸음을 잡는 소나무. 온몸으로 역사를 품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그 아래 솔걸(솔잎이 해를 넘기면 누렇게 낙엽 되어 떨어진 것)이 가득하다.

오랜 세월 견뎌온 풍파가 연륜을 말해주는 듯 울퉁불퉁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도서관 근처 소나무. 깊게 골파인 껍질이 문해학교 할머니들의 삶 같아 기품보다는 왠지 먹먹하다.

구순(九旬)이 목전인 부모님 세대, 무거운 삶을 짊어진 부모님들은 등이 휘고, 무릎이 다 달아빠지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툭툭 튀어나오도록 삶을 일구셨다. 때문에 굵은 손마디와 손바닥엔 굳은살이 박이고 거북이 등처럼 손등은 척척 갈라졌다.

그런 손등을 보고 소나무 껍질 같은 손이라 했는데,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문해학교 어르신들의 시화전을 관람하는 내내 소나무 껍질이 얼 비췄다

문해학교는 시대적 배경과 어려운 환경으로 교육받을 기회를 놓친 성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도와주는 늦깎이 한글학교다.

문해학교 어르신들의 시화가 위풍당당하면서도 화려하게 증평군립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화작품 아래엔 어르신들이 손수 작품을 제작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다.

그 사진을 가만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어르신의 굵은 손마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월의 흔적이 애잔하다. 허리가 `ㄱ'자로 될 정도 구부러진 어르신, 거칠고 두툼한 손의 어르신, 은빛 머리카락이 곱디고운 어르신 등 갖가지 사연을 끌어안고 까막눈으로 평생을 사시다 입문한 문해학교다.

인류문명 발전으로 우주를 날아다니는 이 첨단시대에 까막눈이라니 문맹이란 말이 참으로 낯설다. 아니 까막눈이란 단어를 일상 대화에서 써 본 기억도 없다.

본시 글을 모르는 사람을 두고 예전엔 까막눈이라 불렀는데 너무나 생경스런 까막눈, 시화전을 감상하는 내내 내 머릿속은 어르신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가슴속에 끝없이 파동이 인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암울했던 날들, 문맹으로 자신을 원망하며 평생을 괴로워했을 터. 유리조각 위를 맨발로 걷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매 순간들, 까막눈으로 살아온 인생길 늘 체한 듯 명치끝이 뻐근하고 얼마나 아팠을까. 어르신들의 시화전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한참을 머물렀다.

이제 막 한글을 터득한 어르신들, 알록달록한 오색 펜으로 삐뚤 빼뚤 꾹꾹 눌러쓴 자작시와 동화 같은 그림으로 완성된 시화. 이빨 빠진 옥수수처럼 군데군데 오타가 있지만, 어르신들의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글을 몰라 버스를 탈 때도 주변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어보고 타야 했고, 병원도 제대로 찾아가지 못했을 뿐더러 까막눈이 탄로 날까 늘 살얼음판이었던 삶, 그 삶이 그대로 시화에 녹아내려 있었다.

이제껏 문맹으로 살아왔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한글 공부며 더하기, 빼기를 하느냐고 툭툭 던진 한마디는 비수가 되어 꽂혔었다. 독려는 물론 위로와 격려도 없었다. 그럼에도 `낫 놓고 기역도 모른다.'는 자신의 삶, 까막눈 탈피를 위해 기역, 니은, 디귿을 서러움과 희망을 담아 또렷하게 꾹꾹 쓰고 또 썼다.

이제는 물어보지도 않고 물건을 고르고, 계산도 할 수 있고 은행도 혼자 갈 수가 있다. 또한, 걸어다니면서 간판을 읽을 수도 있다. 뿐인가 손주에게 문자도 보낼 수도 있다.

길고도 긴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조금은 더디고 느릿하지만 밝은 빛을 향해 걸어 나오신 어르신들의 여정, 너무 아름다워서 먹먹하다. 그렇게 한 많은 까막눈으로 한평생을 살아오셨지만, 이젠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연분홍빛 봄날만 되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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