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교육도시로 만든 실학자 한백겸
청주 교육도시로 만든 실학자 한백겸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1.10.2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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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청주시 상당구 가산리에 가면 청주한씨의 시조인 한란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동남지구 운동동 동남지구에는 `청주한씨시조제단비(淸州韓氏始祖祭壇碑)'가 세워져 있다. 청주 한씨는 대단한 명문 가문이다. 조선 초기에 높은 벼슬에 오른 인물을 연이어 배출하여 명성이 자자하던 성씨다.

청주한씨 가문을 빛낸 많은 인물 가운데 청주지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이 한백겸(1552~1661) 선생이다. 한백겸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분이다. 조선 16대 왕 인조의 정비이며, 소현세자와 효종의 어머니인 인열왕후의 백부다. 1586년 천거에 의해 중부참봉이 되어 오늘날 시장에 해당하는 목사를 두루 거쳤고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실학자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항상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학문을 강조하였다.

선생은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 병중에도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완성했다. 그 책이 뒷날 조선시대 역사지리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책이었다. 당시에 국가에서 간행했던 책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사관과 독창적인 견해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정리한 책이었다. 이 책이야말로 후대의 학자들에게 역사지리에 대한 위대한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수록'의 저자인 반계 유형원과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도 선생의 높은 수준의 학문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그가 확정한 한강 이남의 `삼한설(三韓說:마한·진한·변한이 한강 이남에 있었다는 학설)'은 모든 실학자들이 긍정했던 부분이었다. 아울러 고조선의 영역이 만주와 중국 일대에까지 미쳤다는 학설도 한백겸의 주장이다. 특히 선생은 선조들의 고향인 청주목사로 재직할 때 청주를 교육의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기록에 의하면 충청도안문어사 성진선이 보고하기를 “청주 목사 한백겸은 자상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강명하게 다스려, 속리의 부화스런 작태를 물리쳐버리고 힘써 돈실한 정사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교가 퇴폐된 때를 당하여 홀로 능히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아 공무에서 물러나온 여가에는 언제나 제생과 함께 경의를 강론하고, 공용의 남은 재물을 덜어내 경적을 널리 구입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이렇듯 선생은 정사를 공정하게 하고, 후대를 교육하고 역사적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청주목사로 있던 시기에 자신의 시조인 한란을 제사 지내기 위해 1605년(선조 38)에 `청주한씨시조제단비'를 세웠다. 한백겸은 시조인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고, 그 동생인 이조참판 한준겸은 제사 때마다 후손들이 읽고 알 수 있도록 시조의 내력을 상세히 서술해 자신들의 조상은 물론 지역사회의 뿌리를 찾았던 것이다. 선생은 사후에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일제 강점기 명문 학교는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일 것이다. 그리고 경제 개발 시기에는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공업계 학교가, 군부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학교가 명문 학교였다. 코로나19와 지구온난화로 21세기 환경 재앙의 시대에는 어떤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가 명문학교일까? 환경 교육을 잘하는 학교가 명문학교일 것이다.

`청주(淸州)가 맑은 고을'이라는 뜻의 지명이라고 한다면 이름에 걸맞은 교육의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맑은 지구 환경을 교육하는 학교들이 많아야 할 것이다. 한백겸 선생이 꿈꾸던 교육의 도시 청주가 깨끗한 환경을 위한 교육을 실천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 교육을 선도하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 도시가 되기 위해 후손들은 더 많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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