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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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7.2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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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사회학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한국 최초의 분데스리거였던 차범근은 어느 광고에서 '축구의 생명은 골'이라고 말한바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전·후반 90분의 경기 과정에서 89분을 지배했음에도 1분 만에 골을 먹는다면 그 89분의 가치는 송두리 째 사라지는 것이 축구이기 때문이다.

'기어서 8강', '기적의 8강', '아슬아슬 90분' 등의 아침신문 제목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한국축구는 어찌됐든 홈팀 인도네시아를 이겼고, 어찌됐든 8강에 올랐다.

차범근이 말하는 '축구의 생명은 골'이라는 절대명제를 지켜낸 셈인데, 그래봤자 8강의 행운이 자력이 아니라는 점이 씁쓸하다.

한국축구대표팀이 이번 아시안컵 조별예선에서 거둔 성적은 1승1무1패. 지금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에 흥분을 억누를 수 없는 국민의 기억에 비춰볼 때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성적이다.

문제는 예선 3경기를 치르는 동안 모두 270분의 과정이 치졸하기 짝이 없다는데 있다.

고집스럽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집착하는 측면 돌파와 무리한 백패스는 대표팀 경기를 시청하는 국민을 지루하게 했고, 급기야는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산술적 두뇌활동을 강요당하기까지 했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7월 남미대륙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소위 '축구전쟁'을 했다. 1970년 제9회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비롯된 광적인 축구열기가 2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이 된 것이다.

이 때만해도 축구는 곧 국가라는 등식이 엄연했고, 국가 간 경기에서의 패배는 온 국민을 비탄에 젖게 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여서 킹스컵이나 메르데카배 등 아시아권 축구대회에서의 우승은 무개차를 타고 서울 한복판을 당당하게 질주하는 개선장군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마치 나치독일의 선전상 괴벨스의 밴드웨곤 효과를 연상시키듯 국가와 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몸을 자본으로 삼아 천문학적인 연봉으로 대접받으면서 축구가 하나의 산업으로 정착하면서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가 국가를 대표하는 월드컵에서 소극적인 경기를 한다는 비난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스코틀랜드의 사회학자 리처드 줄리아노티는 그의 저서 '축구의 사회학'에서 다른 문화와 국가들이 축구의 해석과 실천으로 특정한 양식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사회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축구를 하나의 문화로 상정하고 이를 전통과 현대- 탈현대의 틀을 빌어 설명하는 그의 시도는 축구에 대한 전 지구적 열정을 대변한다.

중요한 것은 과정에 있다. 우리가 축구를 상급학교 진학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그 과정에서 지나친 경쟁과 투쟁 심리의 자극을 통해 전투적 상황을 연출하는 사이, 소위 '아트 사커'라는 경지를 이끌어내며 문화를 만들어내는 축구 선진국과의 차이는 분명하다.

축구를 즐기는 것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공차기와의 사이에는 분명한 문화적 차이가 있다.

'축구의 생명은 골'이라는 절대명제는 축구를 문화 예술적인 가치로 환원하는 과정의 숭고함에서 더욱 흥미를 배가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오로지 승리에만 집착하는 한국축구의 어이없음에서 비롯된 탄식은 벌써부터 진흙탕인 대선의 과정에 대한 불만으로 전이된다.

결과는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으며, 국민은 과정의 아름다움을 더 기대하는 선거풍토가 아쉽다.

꺼져가던 불씨를 가까스로 되살려낸 이번 아시안컵 축구에서의 한국대표팀의 선전과 대선주자들의 숭고한 통과의례를 함께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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