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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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10.2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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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제 몸집의 절반이나 되는 잣송이를 물고 청설모가 급히 달아난다.

가만히 지켜보니 높은 나무에서 잣송이를 따 물고 내려오기도 하고 위에서 떨어뜨리곤 쏜살같이 내려와 물고 가기도 한다. 그리고 보니 곳곳에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이곳 봉학골에는 까만 털의 청설모와 줄무늬가 선명한 다람쥐가 많이 산다. 얼마 전만 해도 녀석들은 꺼칠해 보였는데 잣이 익기 시작하면서 털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숲길 곳곳에 껍질이 수북하고 알뜰히 까먹고 버린 솔방울은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공예품을 보는 것 같다.

매일 오가며 만나는 청설모는 내가 옆을 지나가도 이제 개의치 않는다.

가끔은 앞장서 길을 안내하듯 힐끔 돌아보며 기다려 주기도 한다.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나무 위로 오르는가 싶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숲을 자유롭게 누비는 모습에 이곳을 찾는 이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굴을 파고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양식을 보관하는 다람쥐와 달리 청설모는 겨울잠이 없다. 열매가 익기 시작하자 그들의 겨울 준비가 시작되었다. 볼이 터지게 물고 온 씨앗을 이곳저곳에 묻고 갈무리하느라 바쁘다. 겨우내 먹고 남거나 찾지 못한 것들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될 것이다. 더러는 이듬해 싹을 틔워 숲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다. 동물들의 욕심이 크면 클수록 자연과 함께 숲을 가꾸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한데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은 어떤가.

나는 냉장고에 딸린 냉동실이 작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추석에 음식 준비를 하면서 더욱 절실해졌다.

서랍처럼 생긴 냉동고가 있으면 나물과 생선 육류 등을 칸마다 이름을 붙여 넣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먹으면 알뜰한 살림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즘 숲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일요일 아침 냉동실의 음식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끝없이 나오는 얼음덩이를 꺼내놓고 보니 그 양이 많았다. 봄에 넣어둔 산나물을 비롯해 차곡차곡 쌓아만 놓고 일 년이 지나도록 꺼내 보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정리를 마치자 비좁던 냉동실에도 여유가 생겼다.

다 쓰지도 못할 것을 쌓느라 정말 중요한 것에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 욕심껏 채우려고 냉동고를 들일 궁리를 할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크지 않아도 되고 마음껏 넣어도 꺼내 쓰기 복잡하지 않은 작은 마음 방 하나를 가지고 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초대하고, 독서 모임을 통해 작품의 느낀 점을 공유하고, 문우들과 글을 주고받기도 한다. 정작 글솜씨는 제자리를 맴돌지만, 가끔 내가 넣어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꺼내 쓸 때 가장 행복하다.

길가에 씨앗을 익히느라 애쓰는 풀꽃들의 수고를 바라본다. 어느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 마음의 빈약함을 돌아보며 독서를 통해 마음의 키를 작게나마 넓혀 보겠다 다짐한다. 투병 중인 남편을 응원하며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까지 모두 마음 방에 넣고 여몄다.

여전히 청설모는 바쁜 걸음으로 가을을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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