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0점 조정
마음의 0점 조정
  • 방 석 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1.10.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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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방 석 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 석 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달마 대사를 초조(初祖)로 하는 불교의 선가(禪家)에는 `양변(兩邊)을 여의라'는 말이 있다. 대소유무(大小有無) 원근친소(遠近親疎) 즉 크고 작음, 있고 없음, 멀고 가까움, 친하고 친하지 않음 등의 상대적 변견(邊見)이 바로 양변이다. 그런데 양변을 여의라는 것이, 무조건 양변은 나쁜 것이니 버려야만 한다는 주장일까? 그 같은 주장이라면 그 또한 크고 작음, 있고 없음, 멀고 가까움, 친하고 친하지 않음 등의 양변은 나쁘고, 양변을 여의는 것만이 좋은 것이란 또 다른 양변에 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숨을 들이쉬고 밥 먹는 것만 옳다고 주장하면서도, 똥 싸고 숨을 내쉬는 것은 그르다고 강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양변은 나쁜 것이고 양변을 여의는 것이 좋은 것이란 견해와 주장 자체가 이미 지독한 이분법적 양변에 떨어진 말이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깨달음을 향한 중요 이정표로 오랜 세월 동안 강조되어 온 `양변을 여의라'는 말의 진의(眞意)는 무엇일까? 과거의 온갖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기억 뭉치인 업식의 `나'가 일으키는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등의 분별 망상을 일단은 쉬라는 것이 양변을 여의라는 말의 속뜻이다. 양변을 여의는 근본 목적은, 온갖 악지악각(惡知惡覺)의 저장 창고인 업식의 `나'가 일으키는 분별 망상을 쉼으로써, 그 어떤 도그마나 프레임에도 걸림 없는 순수의식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순수의식을 회복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오랜 세월 매몰돼 있던 우물을 벗어나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양변을 여의라는 말의 진의는, 단순히 양변을 여읨으로써 크고 작음도 없고, 있고 없음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는 고장 난 저울처럼, 바보 먹통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양변을 여의고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달은 뒤에는 걸림 없이 양변을 쓰면서, 대기대용(大機大用)하는 대자유의 삶을 누리라고 강조한다. 나 없음의 무아(無我)란 `심령이 가난한'상태와도 일맥상통하며, 0점 조정이 된 저울로도 비유될 수 있다. 0점 조정된 저울은 0점에 집착하며 0점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과 친한지 원수인지 등과 무관하게 언제든 올려놓는 물건의 무게를 정확하게 잴 뿐이다. 마찬가지로 양변을 여읜 나 없음의 지공무사한 마음은 0점 조정된 저울처럼, 내편 네편 및 당리당략 등에 흔들리는 일 없이, 목전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정견(正見)한 뒤에,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행(正行)의 올곧은 삶을 살아갈 뿐이다.

자신이 속한 우물 속의 온갖 주의 주장들에 익숙해지고, 그것들이 전부인 양 세뇌까지 당한 과거의 기억 뭉치인 업식의 `나'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자신의 당과 자신의 종교가 훌륭하다고 주장해도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같은 모든 행태는 자신의 만족과 제 이익을 위해, 제 논에 물을 대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대소유무 원근친소 등의 양변을 여의지 못한 마음은 출렁이는 호수와 같다. 출렁이는 호수에는, 호숫가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바위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진다. 그러나 양변을 여읜 나 없음의 무심인 순수의식 및 갓난아기 같은 마음은 고요한 호수와 같다. 고요한 호수에는 애쓰지 않아도 호숫가에 서 있는 나무의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정확히 비추어진다. 내 안의 온갖 주견인 대소유무 양변을 비워내고, 그 어떤 도그마나 프레임 등에 걸림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난 뒤, 세상을 맑히고 밝히는 도덕군자들이 대거 출세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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