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치다
때를 놓치다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10.1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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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손바닥만 한 자투리땅도 놀게 놔둘 수 없는 게 텃밭을 일구는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씨앗은 파종시기를 놓치면 일 년이 넘어간다. 일 년이 넘어가면 발아율도 떨어지지만 길러 먹지를 못하니 사서 먹던가, 아니면 그해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상황이 된다. 그러니 작물별로 파종시기를 일일이 기억해둬야 한다.

또한, 토양의 조건도 다르니 경험치를 살려 구획해 놓아야 한다. 한 가지 작물이면 편할 텐데 푸성귀부터 과일까지 없는 게 없는, 농수산물 시장을 방불케 하는 작물들을 모두 키워내려면 감내해야 할 일이 많다. 계절별로 월별로 비 오는 시기까지 고려해가며 초보 농사꾼의 머리는 온통 씨앗에 몰두해 있다. 그래서 하는 일이 씨앗을 구분해서 모아놓고, 파종시기별로 순서를 정해서 배치한다.

정리할 때는 누구보다 선수다. 씨앗의 모양으로 어떤 씨앗인지 알 정도가 되었으니, 이제 준 농사꾼이라고 해도 좋을 듯한데, 건방진 생각이었다는 게 바로 들통이 났다.

배추포기가 제법 커지고 무뿌리가 땅 위로 존재를 드러낼 즈음, 겨울 전까지 먹을 쌈채소와 월동 가능한 작물을 파종한다. 쑥갓과 다채, 시금치 씨앗을 집어 드려는 순간, 앞에 적배추 씨앗이 있고 그 뒤를 양파, 적양파가 연이어 서 있다. 이 무슨 일인가. 벌써 배추는 포기를 안고, 무는 솎아서 이제 씨알이 제법 굵어지는데, 지금쯤이면 양파는 모종판에 씨앗 파종을 해야 했는데.

그 옆으로는 올 초겨울 꽃을 피울 샤프란, 내년 봄에 개화할 크로커스, 튤립, 알리움 등등 헤아릴 수 없는 구근들이 다소곳이 땅에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뿌리가 썩지 않게 캐낸 구근은 여름 장마, 가을장마를 기다렸다. 어느 것 하나 썩지 않고 자구도 제법 달았다. 서둘러 식재할 것은 한옆으로 모아두고, 내년 봄에도 파종할 수 있는 것을 분리해야 하는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둥근 마씨에서 싹과 뿌리가 나오다 엉켰다. 통제된(?) 플라스틱 상자 안, 손톱만 한 작은 몸집에서 버틸만한 양분은 다 썼다. 저장된 양분을 모조리 소진하고 말라 비틀어 죽었다.

땅에 떨어진 씨앗 하나 놓칠세라 주워담았다. 또르르 굴러 낙엽 밑에 안착한 녀석마저 야무진 족집게 손으로 주웠다. 진즉 떨어진 녀석은 뿌리가 내렸지만 길지 않다고 여기며 주워담았다. 넝쿨에 남아있는 덜떨어진 녀석마저 하나하나 집어 모았다.

그렇게 모은 씨앗은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안에 잘 모셨다. 내년에 좋은 흙에서 자라게 해주겠다. 약속을 하면서. 여기저기 너무나 너저분하게 자라 캘 수도 없으니 씨앗에 나름 생각을 전했다. 그게 작년이었다. 그리고 올 씨앗을 받아 신문지에 잘 포장해 보관하고 우연하게 작년 보관한 씨앗을 찾아낸 것이다.

뚜껑을 열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이 처참한 상황을, 겨울을 이기고 발아를 했는데 흙을 만날 수 없으니, 통풍구멍은 있지만, 씨앗이 구멍보다 크니 구멍을 통해 내밀 것은 뿌리뿐이다. 그중 몇 개는 아직 살아있는 듯하다.

일 년이 지나 몸은 다 말랐지만 뿌리와 싹이 살아있다. 미안한 마음에 몇 개라도 건져보려 손가락으로 헤집어 모아본다. 그리고 조그만 화분에 넣었다. 흙을 두툼하게 깔고 포슬포슬한 상토로 덮었다. 아둔한 인간 때문에 1년은 빛도 물도 흙도 보지 못하고 플라스틱 상자에만 갇혀 서서히 죽었다. 그냥 떨어진 채로 놔뒀더라면, 지금쯤이면 마 밭이 돼 있었을 텐데 커다란 나무와 엉켜 캘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씨앗을 달아 주는 어미가 되어 있었을 텐데, 제대로 실행도 못 하고 때를 놓친 결과, 통제의 끝은 죽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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