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린고비 R사장
자린고비 R사장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1.10.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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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시골에 갔다가 막내 여동생의 차를 함께 타고 올라오게 되었다. 제부는 앞좌석에서 운전만 하고 동생과 나는 뒷좌석에 앉아 이전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촌인 정숙의 근황이 화제가 됐다. 천여명의 사원을 거느린 유명 그룹의 계열사 사장인 그의 남편이 아파트 재활용품을 뒤진다는 것이다.

“에이, 설마”했지만,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란 생각이 들긴 한다. 오래전 사촌이 통사정하듯 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단사원이었던 그는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는데 얼마나 무섭게 절약하는지 양말을 기워 신고 메리야스를 기워 입는다고 새신랑을 못마땅해했다. 낡고 구멍 뚫린 메리야스를 휴지통에 버리면 어느새 다시 주워다가 알전구를 집어넣어 기워 입는다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촌은 친정에 와서 하소연했다.

사장이 되고 출세한 만큼 지금은 달라졌을 거라 여겼던 우리의 생각은 빗나갔다. 여전히 사촌은 질색팔색하지만 남편의 자린고비 짓도 여전하단다. 양말이나 러닝셔츠를 기워 입진 않지만, 오십이 눈앞인 요즘에는 아파트 재활용품을 뒤지고 다닌단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사느라 피곤한데, 그는 어쩌면 그렇게 당당한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동생이 너스레를 떤다. 발가락이 보이는 양말을 신는 것쯤은 다반사여서 이런 모습을 본 아래 사람들이 오히려 민망해하며 양말과 속옷을 한 뭉텅이씩 사무실에 사다 놓기도 한단다. 마누라만 욕 먹이지 말고 제발 체신 좀 챙기라는 성화는 듣는 둥 마는 듯, 퇴근할 때마다 무엇인가 들고 들어오는 걸 즐기는 것처럼 보였단다.

재활용품 모아놓은 곳을 뒤져서 무엇이라도 가지고 집에 들어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병이 단단히 들었다고 성화를 대며 말리다가 이제는 지쳐버렸다는 사촌, 오죽하면 경비아저씨는 쓸 만한 물건을 모아두고 퇴근하는 R 사장을 불러 세울까.

그렇게 들고 온 잡다한 물건은 다용도실에 가득 채워져 있단다. 집안 꼴 다 버린다고 투덜대는 마누라에겐 아예 다용도실 문을 닫고 살라 한다니, 깔끔하고 널따란 아파트는 옛말, 책과 옷과 신발, 작은 가구까지 다용도실은 너저분한 게 고물상 저리 가란단다.

“이거 봐, 이 참고서 너무 깨끗해, 누군가 공부도 되게 안 했나 봐, 처제네 아들 몇 학년이지?” 이러면서 주워다 놓은 참고서가 몇 권인지 모르고. 한 번은 운동화를 주워와 깨끗이 빨아서 며칠을 말리더니 마누라보고 신으라고, 사촌이 팽개치듯 쓰레기통에 버렸더니 다시 주워다가 딸을 달래고 얼러서 신게 하더란다.

내로라하는 사장님의 따님이, 외국 은행에 다니는 직장여성인 딸이 누가 버렸는지도 모르는 신발을 주워다 신고 다닌다니. 그것뿐이랴, 한번은 멜빵 바지를 주워다 손질해 처남댁한테 선물했단다. 잘 어울릴 거라고. 주운 것인 줄 모르는 그녀는 고맙다고 좋아라 입고 다녔단다.

그 흔한 자가용도 없다고 사촌은 투덜댄다. 회사 전용차를 타기 때문에 마누라와 자녀를 위한 차 한 대쯤 있어도 되련만. 대학생 아들의 한 달 용돈이 고작 20만원이라니 할 말 다한 거다.

회사에서 별명이 교장 선생인 R 사장. 회사 살림은 똑 떨어지게 하는지라 사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혀를 내두르는 자린고비 R 사장.

“은행에 가면 VIP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던데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만든 그 많은 재산, 어떻게 쓰고 싶다니?” “모르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아이들까지 경제관념이 장난 아닌가 봐. 콩 심은 데 콩 나지, 다른 게 나겠어? 그런 사람은 바람피우고 싶어도 돈이 아까워서 못 피울 테니 이래저래 정숙인 복도 많지 뭐야.” 찧고 까불며 깔깔거리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집에 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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