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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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1.10.0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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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가을은 느낌의 계절이다.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가을은 뭔가를 느끼게 한다. 여름 바람은 제아무리 빨라도 세월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을 바람은 비록 약하더라도 세월을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다.

조선(朝鮮)의 시인 허균(許筠)에게도 가을은 빨리 돌아가는 시계였다.

행산에서(杏山)

遠客愁無睡(원객수무수) 먼 타향 나그네 시름에 젖어 잠 못 이루고
新凉入鬢絲(신량입빈사) 이제 막 차가워진 바람이 귀밑머리로 들어 오네
雁聲天外遠(안성천외원) 기러기 소리 하늘 밖 저 먼 데서 들리고
蟲語夜深悲(충어야심비) 벌레소리는 깊은 밤에 구슬퍼라
勳業時將晩(훈업시장만) 공업을 이루기는 때 장차 늦어지고
魚樵計亦遲(어초계역지) 어부와 나무꾼으로 돌아갈 계획도 늦어지네
起看河漢轉(기간하한전) 일어나 바라보니 은하수는 돌고 있고
曉角動城埤(효각동성비) 새벽 호각소리는 성벽에서 울리네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에게 고향을 그리워하게 하는 계절을 꼽으라면, 단연 가을일 것이다. 가을을 타향에서 맞은 시인에게도 예외 없이 향수병이 도져 나왔다. 밤에 잠 못 이룬 채 뒤척이고 있자니, 가을임을 느끼게 하는 감각들이 또렷하게 살아났다.

이제 막 차가워진 바람이 귀밑머리를 헤집고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찬 바람 다음의 손님은 가을 단골인 기러기와 풀벌레였다. 기러기 소리가 하늘 밖 멀리서 들리는 걸로 보아 가을은 이미 깊었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풀벌레 소리가 야심한 시각이라 한층 더 구슬프다. 이러니 어찌 고향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미 노년에 들어선 시인에게 별다른 미래 비전이 있을 수 없다. 나라를 위해 공훈을 쌓는 것도, 어부나 초부가 되어 초야에 묻혀 사는 것도 다 어려운 나이가 된 것이다. 고향 생각과 자신의 늙음에 대한 자각은 모두가 가을 탓이다. 시인은 기어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왔다. 하늘엔 은하수가 자리를 옮기었고, 성루로부터 호각소리가 날아왔다. 새벽이 온 것이다.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가을은 고통스럽다. 찬 바람은 더욱 시렵고 기러기 울음소리에 외로워지고 풀벌레 소리에서 처량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를 일거에 치료해 줄 약은 단 하나 고향과 가족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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