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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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7.1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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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김 승 환 <충북대학교 교수>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다. 시민운동가들이 모여 회의를 끝내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분이 누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였다. 그의 말문이 열리는 '호시침침(虎視沈沈)'의 순간이 왔다. 정색을 하고 묻는 것은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였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제3의 눈으로 이 두 사람의 수작을 보면서 나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명확히 목도했다.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부르조아적 사회, 즉 공정하고 투명하며 민주적이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시민운동의 본질이 질문자의 의식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정하기만 하면 서열화도 무방하고 불평등도 괜찮다는 것이어서 시민의식 바깥으로 나오기는 힘들어 보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학력지상 주의와 학벌중심 주의를 넘어섰을 것 같은 시민운동가일지라도 학벌의식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 대다수의 시민운동가들은 학벌주의와 학력의식을 넘어서서 인간 해방과 만물 평등의 의식에 다가서 있음은 물론이다.

하여간 나는 이 사태의 진행을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었다. 대답을 해야 하는 당사자는 상당히 지혜로운 사람이어서, 즉답을 피했다. 그러니까 '어떤 학교를 몇 년도에 나왔다'라고 육하원칙에 의해서 답을 해야 하는 판세에, '산업계통의 공부를 했다'라는 매우 모호한 답을 하고는 소주를 들이켰다. 무척이나 애매모호한 답변을 한 셈이어서 질문자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사태가 엇나가고 있었다. 질문자는 어느 고등학교를 나온 자기 선배임을 확신하고 서열화를 분명히 한 다음 선배로 모시겠다는 답까지 준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그만 이 모호한 답변에 그의 계획이 무참히 깨져 버린 것이다.

내가 놀란 것은 답변자가 소위 좋은 학벌과 학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위선(僞善)이 있을 수 있다. 소위 엘리트들은 함부로 자신의 학력을 공표하지 않는다. 아주 미묘하게 자신의 높은 학벌을 유추하도록 수수께끼를 내는 고도의 전략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우월감을 즐긴다. 그렇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답변자는 그런 위선적 회피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조는 그런 것을 묻고 답하는 저급한 수준을 한탄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내면의 한탄을 외면의 겸양으로 바꾸는 그의 품성에 탄복할 즈음, 화제를 신정아 가짜 박사학위로 돌림으로써 우회적인 비판을 가했다.

꼭 필요하지 않다면 학력을 묻지 말자. 철없이 학력과 학벌을 따지는 사람이 있거든 그의 의식을 교정(校正)시켜 주거나, 아니면 어린이 취급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학연을 가장 중요한 삶의 기둥으로 삼는 사람은 정글의 동물 세계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게다가 출신학교나 학벌을 따지는 사람이 세상을 어찌 알겠는가.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을 이해할 최소한의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은 의식의 감옥에 갇혀서 세상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이다. 학교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학력의 혜택을 정당하게 누리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이 배타적 장벽이 되고, 사람을 무시하는 도구가 되며, 편가름의 기준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혹 어떤 독자께서 '김가야, 너는 이미 네 직함을 충북대학교 교수라고 씀으로써 학력의 특권을 암시하고 있지 않느냐'고 비판하신다면 겸허히 수용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학력과 학벌을 따지지 않고 더불어 평등하게 살고자 노력한다는 점만은 기록해 두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점잖아야 할 나이의 교수가 왜 시위현장에 나가는가' 교수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그 논리는 바로 학력학벌주의에 매몰된 경우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위선도 반성하지만 동시에 '학벌 없는 사회' 홈페이지를 권하든가,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하지 말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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