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 저수지에서
양곡 저수지에서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1.09.2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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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솜옷과 털 목도리를 칭칭 감은 그 여자, 미친(美親) 여자
저수지 앞에서 새벽 커피를 끓였다

누가 시킨 것도, 잇속 챙길 장사도 아닌 공짜 커피를
카메라에 미치고 예술에 미친 그 여자
작품사진 한 장 찍으러 사방팔방 휘돌다

우리 양곡 저수지
꿈결만 같아
살림을 차리듯
커피 좌판을 차렸다던가

해마다
가을이 깊어지고
안개가 자욱한 새벽이면
잊을 수 없어 다시 찾는 양곡저수지

미친 여자는
해마다 그곳 그 자리에서
커피를 건네더니

은행나무 잎새 물들이는
가을 한 스푼
안개 한 스푼
미친美親 여자 인정 두 스푼의 커피는
붙박이 명물이 될 것 같더니

없다
미친 여자가 없다
<따뜻한 커피 한 잔 하고 가세요> 팻말도 사라졌다

-시 양곡저수지


올해도 때맞춰 새벽에 길을 나선다. 괴산의 양곡저수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산 저산 산 위에서 놀던 가을이 아래로 아래로 달려 내려올 무렵이면 양곡저수지 앞 은행나무들이 먼저 노랗게 옷을 갈아입고 수중나무 그림자 드리운 잔잔한 저수지는 꿈결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특히 새벽 안개 속에 잠긴 저수지와 은행나무의 몽환적인 풍경은 카메라를 아무 데나 들이대어도 작품이 된다는 소문이 소문을 낳아 전국에서 몰려든 사진작가들과 관광객들로 또 하나의 볼거리가 마련된다.

파시가 열린 것도 아닌데 내륙의 작은 저수지에 모여든 저 많은 사람들, 새벽의 이런 장관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단풍이 절정을 이룰 무렵의 새벽은 엄청 쌀쌀하다.

나도 모르게 시린 두 손을 비벼대며 입구 쪽을 살펴보는데, 해마다 그 자리에서 커피를 나누어주던 미친(美親)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십여 년 가까이 가을이면 어김없이 가스불에 주전자를 올려 끓인 커피를 사람들에게 건네던 따뜻한 풍경을 올해는 볼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풍광도 분위기도 예년과 다른 구석이 많아 보인다. 이제는 관광지로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추어졌다는 건가? 커피를 나누기엔 너무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건가?

미친(美親) 여인이 없는 문광저수지, 으스스 한기가 온몸에 퍼진다. 그녀의 따뜻한 커피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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