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과 아프간의 눈물
춘향전과 아프간의 눈물
  • 형경우 충북도 환경정책과 주무관
  • 승인 2021.09.2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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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형경우 충북도 환경정책과 주무관
형경우 충북도 환경정책과 주무관

 

학창 시절에 처음 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모든 구절을 기억하고 있는 한시(漢詩)가 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장원급제 후 암행어사로 잠행 중에 지은 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金樽美酒天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잔의 향긋한 술은 만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맛있는 고기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았더라)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대변되는 당대 관료들의 부패상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는 이 시에 매료되었던 강렬한 느낌 때문일까? 굳이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때때로 이 작품의 주된 심상들이 작중 상황과 어우러져 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몽룡의 재기발랄하면서도 통렬한 사회 지도층에 대한 비판이 요즘 더 매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에 다시 이 작품을 음미하다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란 대목에서 난 한 소녀의 눈물이, 아니 한 민족의 암울한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상당히 착잡해졌다. 최근 탈레반에 의해 수도 카불이 점령돼 정든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아프간 소녀의 눈물, 난민 집단이 돼 버린 아프간인들의 가슴 아픈 현실이 바로 그 문제의 상황이다.

20년 전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천문학적인 재정지원으로 자립·자강의 길을 걷게 될 것으로 예상됐던 아프간 정부는 왜 이리도 쉽게 무너졌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억만금을 쏟아붓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국가적 위기에 닥치기 전에 수시로 검진을 하고 체질 개선에 힘쓴다 해도, 견고하게 자리 잡은 내면의 부패성은 쉽게 떨쳐내기도 힘들고 언제나 파국의 순간에 그 정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지속적인 반부패·청렴 자가 진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나 자신 또한 이러한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느 날 내가 춘향전의 배경인 조선시대로 떨어져 고급 관리가 된다면, 과연 청백리로 살아갈 수 있을까. 탐관오리가 되어 숨겨진 욕망을 마음껏 채우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만약 내가 수많은 인력을 거느리고 예산을 주무르는 고위직에 앉는다면, 그때도 양심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공직자가 될 수 있을까. 처음 공직을 시작할 때 항상 마음에 새기고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헌법 제7조 제1항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를 삶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2021년 우리 사회도 LH사태 등을 겪으며 공공부문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진 국민 신뢰도를 다시금 쌓아 올려야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나 자신부터, 그리고 모든 공직자가 특정 시대와 지역을 넘어 전 인류에게 동일한 교훈을 안겨주는 역사 앞에서 겸손하게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안의 청렴 의식을 일깨워 조국과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될 것인가, 부정·부패에 길들여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몽룡의 명시를 읊조리며 청렴 공직자의 삶을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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