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꽃이 피었다
가을밤 꽃이 피었다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9.28 1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아무도 모르게 폈다. 꽃은 애초에 소문일랑 낼 생각도 없었다. 이 세상에 온 것은 소풍이라고 하지 않던가. 스리슬쩍 그렇게 온 듯 안 온 듯 가려고 했다. 그럼에도 하얗고 탐스런 자태를 한 남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지난밤에 하얗게 핀 탐스런 꽃을 봤냐고. 금시초문이라는 아내의 표정을 읽고는 쾌재를 부르더니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구와 술 한 잔을 하고 들어오는데 수돗가 옆에 놓여있는 항아리 옆에서 탐스런 하얀 꽃이 자신을 부르는 듯해 한참을 바라보다 왔다고 했다. 그 꽃은 나팔꽃 모양의 길고 커다란 꽃이라고도 했다. 밤이라 꽃만 보이고 어떤 화초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그 소리를 듣던 아내의 눈이 커지더니 단박에 `아, 귀면각이 꽃을 피웠구나!'라며 혼잣말을 했다. 매일 아침 들여다보는 화초들이었는데 요 며칠 명절 준비로 바빠 귀면각에 꽃대가 올라왔는지도 몰랐다.

귀면각이 우리집으로 온 것은 이십여 년 전쯤이다. 그때는 나도 남편을 도와 사료가게 일을 했을 때였다. 사료를 사러 오셨던 노부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이 몸이 아파 키울 수 없게 되었다며 화초를 주고 싶다고 했다. 귀한 것이라 다른 사람보다는 우리에게 주고 싶다 하여 그분들 댁으로 가서 싣고 왔다. 그 화초가 `귀면각'이라는 선인장이었다. 얼마나 크든지 남편의 키를 훌쩍 넘겼다. 트럭에 옮겨 싣는데도 애를 먹였던 기억이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귀면각은 우리집으로 온 그해는 꽃을 피우지 않더니 다음해 부터는 활짝 꽃을 피워 올렸다. 아마도 자리를 옮긴 탓이었을 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꼭 밤에만 피었다. 오래 피지도 않았다. 딱 하룻밤이었다. 그 밤이 지나면 그 꽃은 힘없이 사그라지고 더 이상 오므린 잎은 펴질 않았다. 캄캄한 밤에 펴서일까. 하얀 꽃 빛은 온 세상을 밝혀주는 듯했다. 키가 커서인지 선인장 가지 이곳저곳에서 같이 올라오기도 하고 시간차를 두고 꽃대를 올리곤 했다. 그렇게 일 년에 한 번 가을밤을 밝혀주던 귀면각 꽃이었다.

그런데 10년 전 우리 집을 새로 지으면서 귀면각을 친정집에 맡기게 되었다. 엄마는 귀면각이 선인장이다 보니 추우면 안 되니 하우스에 놓자고 했다. 그렇게도 아껴 주었던 귀면각을 엄마는 어느 날 막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내가 그 광경을 목도했을 때는 귀면각의 3분의 2가 잘려나간 뒤였다. 그때부터 엄마에게 치매가 찾아왔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엄마는 밤에 하우스에 들어가니 웬 키 큰 남자가 있어 때렸다고 했다. 원망을 할 수도 없었다. 귀면각은 그 뒤로 시름시름 썩기 시작하더니 내 팔뚝 반만큼의 크기만 살아남고 말았다. 그리고 10년 동안을 꽃을 피우지 않았다. 우리도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것만도 요행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상흔이 또렷이 남아 있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드디어 어젯밤에 귀한 꽃 한 송이를 피워 올리다니 기쁨보다는 고맙다는 생각이 앞섰다.

키가 작으니 당연히 꽃대도 하나밖에 올리지 못한 건 당연하다. 상처를 이겨내고 피워 올리느라 애를 썼을 텐데 보아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고 미안했다. 아침에 나가보니 입을 오므린 커다란 꽃송이가 힘없이 매달려 있다. 긴 세월 상처를 이겨낸 것도 대견한데 이렇게 또 꽃을 피워 내다니 정말 고맙고 또 고마웠다. 내년에는 꼭 잊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꽃송이를 어루만져 주었다.

하늘엔 성근 별들이 빛나고 풀 섶에선 가을벌레 소리 요란하다. 가을밤, 상처가 꽃이 되어 돌아온 아름다운 순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