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 박영자 수필가
  • 승인 2021.09.1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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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영자 수필가
박영자 수필가

 

오랜만에 마트에 갔다. 간장과 올리브유 부추, 딱 세 가지만 사 오겠다고 메모를 해가지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이것저것 욕심나서 쇼핑바구니에 담았다. 무거운 짐이 부담스러워 자제한다고 하면서도 견물생심이라고 세일하는 물건 앞에서 또 더 집어넣고는 계산대 앞에서 후회가 밀려왔다.

20리터 종량제 봉투에 한 자루가 되었다. 집에까지 갈 일이 난감했다. 배달을 부탁했지만 시간이 늦어 배달원이 이미 퇴근했단다. 별러서 나온 길이니 두 번 걸음 하기 싫어 비척거리며 제과점에 들러 식빵까지 샀으니 양손에 짐이 한 가득이다.

편한 길은 좀 멀어서 아파트 뒤로 난 지름길을 택했다. 짐이 무거워 다리가 헛놓이고 진땀이 났다. 얼마 안 가서 열다섯 개의 계단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난감했다. 그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언감생심. 계단 밑에서 한참을 서 있는데 땅거미가 내린 어둑한 길에 재깔거리며 중학생쯤의 남학생 둘이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닌가. “학생들, 미안한데 이 짐 좀 저 계단 위에 까지만 올려놔 줄 수 있을까?” 내 부탁에 한 학생이 짐을 들고 성큼성큼 계단 위까지 갖다 놓고는 다시 내려와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까지 하고는 큰길로 빠져나갔다. 학생들 덕분에 무사히 집에 올 수 있어 많이 고마웠다. 욕심을 부린 나는 짐을 날라다 준 학생만도 못했으니 판정패를 당한 셈이다.

한숨 돌리고 TV를 틀었다. 이게 웬일인가? 뉴스에서 해괴한 꼴을 보게 되었다. “여주에서 10대 고등학생들이 노인에게 막말을 내뱉고 학대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SNS에 공개돼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앵커의 말은 이랬다. 노란 비옷을 입고 앉아있는 60대 할머니에게 학생이 다가와 대뜸 “담배 사줄 거야 안 사줄 거야? 그것만 딱 말해. 사줘? 안 사줘?”하면서 무언가로 머리를 때린다. 겁에 질린 할머니는 아이들을 쫓아 보려 하지만, 오히려 괴롭힘은 더 심해졌고 열일곱이라는 학생은 예순 살이라는 할머니를 국화꽃으로 마구 때렸다. 그것도 위안부 할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소녀상에 놓여 있던 꽃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또 놀라운 것은 그 모습을 찍고 있는 여고생들이다. 할머니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리기는커녕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SNS에서 영상을 본 시민들은 분노하며 가해 학생들에 대한 강력 처벌을 요구했다. 경찰은 가해 학생들을 입건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열일곱이면 옛날 같으면 장가가서 자식을 볼 나이다. 유치원부터 10년 이상 교육받았을 터인데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기본도 안 돼 있는 그 학생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그 학생에게는 할머니가 안 계신 걸까?

내 할아버지가 사시던 농경사회에서는 농사경험이나 일상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풍부하여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어른의 위치에 있었으니, 노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존경을 받았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기계가 모든 것을 대신했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젊은이와 노인들의 지식격차가 커지면서 노인들은 찬밥신세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참아내고 6·25의 비극을 겪어내면서도 오직 자식들의 장래를 염려하며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피땀 흘렸던 그 공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국민배우 김혜자씨가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겪고 느낀 것을 주제로 쓴 자전에세이다. 돌로 때리지 않고 꽃으로 때린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늙어 가는 것은 두렵다.'고 한 어떤 사람의 말이 오늘따라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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