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이 있다면
타임머신이 있다면
  • 박윤미 노은중 교사
  • 승인 2021.09.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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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박윤미 노은중 교사
박윤미 노은중 교사

 

시간을 되돌려서 멈추게 한 다음, 사건이 일어난 순간만 건너뛰어 흐르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필 왜 내 나무가 쓰러진 것인가?

아파트 남쪽 화단에는 산딸나무, 주목, 산수유 등 여러 나무가 있는데 운이 좋게도 키가 가장 크고 가장 풍성한 단풍나무가 우리 집 앞에 자리했다. 연둣빛 새싹이 삐죽 나오는 봄부터 초록과 단풍을 지나 겨울의 하얀 눈꽃까지 매일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거실 창을 가득 채워준다.

아파트 북쪽에는 키가 20m 넘는 잣나무들이 호위병처럼 아파트를 감싸며 열 지어 서 있는데 그중 둘이 우리 집을 지키고 섰다. 짙푸른 침엽수 숲은 사계절 내내 좋지만 하얀 눈송이가 천천히 내리고 초록의 바늘잎 위에 쌓인 하얀 눈이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슬로우모션 같은 겨울 풍경은 단연 최고다. 새들의 방문도 나무들과 함께 온 행운이다.

그러던 것이 올 7월의 어느 일요일, 세찬 바람에 잣나무 하나가 쓰러졌다. 뒷 베란다 쪽이 환하여 그늘이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현장에 가봤더니 땅 위로 울퉁불퉁 건강한 힘줄처럼 뿌리가 넓게 퍼져 있는데 나무는 그 가운데 세워두었던 연필이 입김에 넘어간 듯 허망하게 쓰러져 있었다. 아파트를 덮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대신 옆에 섰던 나무를 건드려서, 다른 집 호위병들은 모두 무사한데 `내 나무들'만 죽거나 상했다. 그날 풍속이 20m/s 이상이었다니 태풍의 중심이 지나는 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그런데 부러진 부위를 자세히 보니 대부분 어두운 색으로 썩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 바람 때문에 쓰러진 것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잎이 무성하고 꼿꼿이 서 있던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나무 한 그루가 베어지고 벌거벗은 죽음의 상처가 햇빛 속에 드러나면, 묘비가 되어버린 그루터기에서 나무의 역사 전체를 읽을 수 있다. 나이테와 아문 상처에는 모든 싸움, 고통, 질병, 행운, 번영 등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근근이 넘어간 해와 넉넉한 해, 견뎌낸 공격, 이겨낸 폭풍우 들이 쓰여 있다.(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중)'

벌써 꼬박 30년이 흐른 그날의 큰바람이 생각났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아빠가 갑자기 입원하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서둘러 막차를 타고 왔다. 아빠는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도 계속 참으시더니 토요일 오전 일을 마치고 병원에 가셨고 바로 입원하게 되었다. 며칠 사이에 급격히 수척한 모습이 당황스러웠지만 반대편에 누워계신 노인분에 비하면 아빠는 고작 40대였으니 곧 떨치고 퇴원할 것이다. 평소와 다른 상황에서 나는 평소보다 더 밝은 표정으로, 심지어 들뜬 가벼움으로 별일이 아닐 거라는 무언의 희망을 만들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밤 우리 집에는 태풍이 몰아쳤다. 내 평생에 가장 큰 바람이었다.

겉으로 푸르고 건강해 보이는 나무라도 매일의 바람을 맞으며, 간혹 세찬 바람을 견디며 무수한 상처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눈 내리는 겨울날로 가서 다시 한번 눈 내리는 풍경을 아름답게 만끽하고 싶다.

허망함을 달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뒷 베란다의 창처럼 뻥 뚫린 내 마음을 블라인드로 가려보았다. 조금 안정이 되었다. 가끔 블라인드를 서서히 올릴 때 이제 북쪽에 짙푸른 숲 그늘 대신 드높은 푸른 하늘이 서서히 열리는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기도 한다. 오늘 내게 있는 것을 의연하게 만나고 소중히 여길 일이다. 새로 만난 하늘과 창 가득 들어오는 여름빛 단풍나무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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