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도담삼봉에서 만나는 개혁의 상징 정도전
단양 도담삼봉에서 만나는 개혁의 상징 정도전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1.09.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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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여덟 곳의 명승지를 `단양팔경(丹陽八景)'이라 한다. 상선암(上仙巖), 중선암(中仙巖), 하선암(下仙巖),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筍峯), 도담삼봉(島潭三峯), 석문(石門), 사인암(舍人巖)인데, 남한강과 소백산맥의 깊은 골짜기가 만나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8곳을 말한다. 이 가운데 도담삼봉은 명승 제44호로 지정되고 근처에 있는 석문(石門)은 명승 제45호로 지정되었다.

1766년(영조 42) 단양 군수 조정세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능영정(瀛亭)이라 했다. 이후 1972년 홍수로 유실된 후 1976년 콘크리트로 삼도정(三嶋亭)을 다시 지었다. 도담삼봉은 남한강 중간에 봉우리가 3개라서 삼봉이다. 삼도정 정자가 있는 섬이 장군봉(남편봉)이고, 남쪽에 교태 어린 첩봉(딸봉), 북쪽에 얌전히 돌아앉은 처봉(이들봉)이 있다.

이 가운데 남한강이 흐르는 단양의 비경 중에 제일 으뜸으로 손꼽는 곳이 도담삼봉이다. 단양군은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며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 지을 정도로 도담 삼봉의 경치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도담삼봉은 단양군 일대에 형성된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든 원추모양의 봉우리로 이 지역의 지질적 특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다. 조선 최고의 시인과 화가들도 도담삼봉의 비경을 예찬했는데 이황, 김홍도, 김정희 등이 시와 그림으로 도담삼봉을 예찬했다. 도로에서 가깝고 주차장과 휴게시설이 잘 갖추어져 누구나 스치듯 찾아가는 곳이 바로 도담삼봉이다. 이곳에 서면 흐르는 남한강과 어우러지는 세 봉우리가 정도전의 음성을 들려주는 듯하다.

“세상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버려지는 것은 필연의 이치이다.” 이 말은 정도전의 `삼봉집'에 나오는 문장이다. 마치 정도전의 생애를 나타내는 듯하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조선건국의 1등 공신이다. 당대의 학자이자 최고의 정치가였다. 고려말 경상도 영주에서 태어나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유명한 목은 이색의 제자이다. 당시의 정몽주와도 동문이었는데, 고려말 부패한 정치와 사회의 개혁을 외치던 신진사대부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도전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백성의 삶 속에서 다져진 민본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영주 봉화지역의 향리였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으로 있을 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 이숭인 등의 유학자들도 함께 이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인임 등의 반대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힘든 관직 생활을 해 나갔다.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정도전은 백성의 고단한 삶을 직접 목격하고 백성을 위한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우게 되면서 `민본사상(民本 思想)'을 체계화하게 된 것이다.

삼봉 정도전은 억울하게 떠난 유배지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해서 남 주려' 준비하는 분이었다.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거듭난 정도전 선생으로부터 코로나와 기후 문제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다음 세대들도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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