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소리
핑퐁 소리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1.09.0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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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코로나 거리두기 4단계가 발령 중이다. 2년여를 코로나 눈치만 보다가 이제는 조금 숨통이 트이려나 했더니 다시 방콕에 칩거해야 한단다. 당이 떨어진 것처럼 의욕마저 바닥이다. 이럴 땐 탁구 한 게임 치면서 스트레스를 날려야 하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핑퐁 소리가 자꾸 귓가에 쟁쟁거린다. 핑퐁 소리는 혼자 내는 소리가 아니다. 너와 내가 함께 내는 소리를 쫓다가 불현듯 임제와 한우의 분홍빛 댓거리 시조가 떠오른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선을 주름잡았던 빼어난 여인들은 기생들임을 알 수 있다. 남자들을 조롱하고 삶의 자유를 구가했던 평양의 황진이를 위시해 홍원 기생 홍랑, 서녀 시인으로 첩이 되겠다고 나선 이옥봉, 시문과 거문고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부안 기생 매창,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전의 기생들이다.

그들은 독특한 자기의 향기를 뽐내며 삶을 빛냈던 여인들이다. 흔히 기생이라면 자신의 의지보다 남자의 선택에 의존하는 직업군으로 알고 있지만 임진란 이전의 기생들은 차원이 다르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비들과 교유하는 문우로서의 기생들은 예술가이며 시인들이었다.

그 시절 기생들의 얘기를 하려면 함께 떠오르는 선비가 임제다. 임제(林悌)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조선조 선조 때 예조정랑 겸 지제교(知制敎)를 지내다가 당쟁을 개탄하고 임금께 직언하는 바람에 미운털이 박힌 인물이었다.

`靑草(청초)우거진 골에 자는 듯 누엇난다/ 紅顔(홍안)을 어듸 두고 白骨(백골)만 뭇쳤난다/ 盞(잔)잡아 勸(권)할 이 업스니 글을 슬허 하노라.'

임제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러 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에 찾아가 읊은 시다. 양반이 기생의 무덤을 찾아 술을 따르며 제사를 지낸다? 그것도 모자라 시 한 수를 지어 읊다니! 양반 상놈이 엄격하던 시절에 그것도 벼슬아치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노발대발 떠드는 바람에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을 당했다던가?

자천타천 벼슬을 그만두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낸 한량이 임제다. 풍류인답게, 시인답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자유로운 영혼 임제. 그의 행동이 양반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같이 그의 행실에 거품을 물고 성토하면서도 그의 학문과 시문은 몰래몰래 따라했다니, 양반과 벼슬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던진 그의 자유로움과 호쾌함은 오늘날에도 많이 회자 된다.

그의 낭만적인 시가 또 있다. 기생 한우와 핑퐁 놀이하듯 주고받은 분홍빛 시가 그것이다.

`北窓(북창)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山(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일기예보가 없던 시절, 서북쪽에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북창이 맑아서 길을 나섰는데 도중에 비를 만났다는 것은 예정에 없던 일(한우를 만난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리라. 호랑이 담배 먹는 시절에 이렇게 꼭 맞는 비유를 하며, 어떻게 기생 찬비와 겨울에 내리는 찬비를 함께 매치시키는 이중구조의 표현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 과연 천재라는 감탄이 나온다.

기생 한우(寒雨), 이름처럼 냉랭하고 쌀쌀맞았던 것일까? 아니면 범접 못 하도록 고고했을까? 그러나 한우의 댓거리는 너무 뜨겁고 고혹적이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鴛鴦枕(원앙침) 翡翠衾(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잘이/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잘까 하노라.'

속이 환하게 다 보이는 분홍 화답시, 맑은 핑퐁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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