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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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안 라폼므현대미술관 미디어아트작가
  • 승인 2021.09.0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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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티안 라폼므현대미술관 미디어아트작가
티안 라폼므현대미술관 미디어아트작가

 

며칠 전 법무부 차관은 아프가니스탄 특별입국자 관련 브리핑과정에서 `황제 의전' 논란에 큰 이슈가 되었다. 필자도 처음 기사와 사진을 접했을 때 고위공직자가 자신의 부하를 함부로 다룬 황제 갑질 의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논란의 법무부 차관 사진에서 직원이 무릎을 꿇고 우산을 받쳐 들게 된 과정이 알려지면서 `황제 의전'에서 `기자 갑질'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강 차관 바로 옆에서 우산을 든 직원이 카메라에 잡히자 기자들이 직원에게 뒤로 가라고 요구했고 카메라 화면에 잡히지 않도록 하는 과정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과정과 맥락이 빠진 상태에서의 이미지 한 장에 하나의 의미를 확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

이번 사태를 접하면서 어린 시절 처음 봤던 밀레의 `이삭줍기' 작품이 떠올랐다. 필자의 학창시절인 1970~80년대에는 밀레의 인기가 상당히 좋았다. 특히 밀레의 `이삭줍기' 작품은 복사본이 많이 나돌기도 했고 부유한 가정에서는 `이삭줍기' 카펫이 거실 한가운데 있기도 했다. 아마 당시 많은 이들이 고향을 두고 도시로 밀려들던 시절이라 그리운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밀레의 그림이 사실주의나 낭만주의를 떠나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렇게 밀레의 `이삭줍기', `만종'과 같은 작품은 어린 시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편안함을 안겨다 준 작품이다. 그리고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아름다운 `이삭줍기' 작품 속에 숨겨진 처절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이삭줍기란 농촌의 상류층 부농들이 빈곤한 농민들에게 베풀어주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농장주들은 빈농들에게 추수를 하고 난 뒤에 들판에 남은 밀 이삭을 주워가도록 허락을 했다. 당시 굶주린 농민들보다 남아 있는 곡식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삭줍기는 엄격한 관리 속에서 이뤄졌다.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 속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 뒤로 말을 탄 감시관이 있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이삭줍기란 말 그대로 농촌의 참혹한 실상을 알려주는 고된 노동의 현장으로 남들보다 한 알갱이라도 더 주워 모으기 위해 잠시라도 허리를 펼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온종일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주운 이삭으로는 빵 한 덩어리 만들 만큼의 밀을 얻을 수 없었다. 작품 속 여인들은 땅속으로 푹 꺼질듯한 모습으로 맨바닥을 바라보며 그들의 처지가 사회의 가장 바닥임을 암시한다. 밀레의 `이삭줍기'는 농민들의 처절한 현실과 추수 후에 상류층 부농들의 넘치는 풍요를 한 장면에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75년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다. 기본적으로 살롱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로 여가를 즐기기 위해 전시회를 찾으며 작품 속 농촌의 풍성함을 느끼고자 했다. 풍요로운 농촌의 모습과 성실한 농부들이 있는 농촌이 도시 부르주아 관객이 원했던 마음의 고향이었다. 밀레의 `이삭줍기'는 풍요로움 보다는 빈곤한 농촌의 고단한 일상이 더 강하게 표현되어 있었으므로 당시 파리 살롱의 관객에게는 다소 불편한 그림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진실된 농촌의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의 처참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었지만 처음 이 작품을 본 필자에게는 아름다워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과정과 맥락 없이 한 면만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의 이 기억이 이번 `황제 의전' 사진 한 장과 묘하게 겹쳐진다.

바로 이미지의 배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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