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1.08.29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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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행복처럼 주관적이고 실체 없는 낱말이 또 있을까? 요즘은 파란 하늘만 바라보아도 좋다. 하늘에 꽃처럼 핀 흰 구름을 보노라면 굳이 클래식에 귀를 열지 않더라도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하다. 코로나 이후 정상적인 감성으론 예전 같은 하늘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삶은 슬픔과 기쁨의 변곡점을 오가며 마디마디 시간의 문을 넘어왔다.

며칠 전 1년 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후배가 궁금하여 전화를 걸었더니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다. 잘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그동안 산속에 들어가 휴양하고 내려왔단다. 지난해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모 회사의 주식을 2억 원 가까이 투자했다가 자꾸 폭락해서 원금 30%만 건진 후 매각했다고 한다. 아파트를 전세 놓은 자금으로 운용한 것인데 다 날렸다고 울먹였다. 한 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의 속성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많은 사람이 좌우명처럼 삼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는 관용구는 때로 작은 위로를 준다. 행복하다는 이 순간도 흘러갈 것이며 불행하다는 순간도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흐르지만 자신의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기쁨과 슬픔이라는 흑백의 옷을 입는다.

다윗은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왕이다. 한미한 양치기 소년에 불과한 그가 블레셋 사람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질 하나로 대적한 후, 왕위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세공사를 불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두 상황에 꼭 맞는 문구를 넣은 반지 하나를 주문했다. 세공사는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지혜를 청했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문구를 받았다. 그러고 보면 다윗왕의 처세는 참 현명했다. 교만에 빠질 법한 사태를 경계하며 자중했던 모습이 남다르다. 대부분 고난이나 고통이 닥쳤을 때 상태를 점검하는데 그는 미리 자기 검열과 자기 경영에 힘썼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기가 길어지자 내가 속한 독서 모임은 가볍게 `행복'이라는 주제를 선정해서 시리즈 독서를 이어갔다.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기초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임 샤피라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최인철의 《굿라이프》를 비롯해 총 여섯 권의 시리즈 읽기를 하면서 사회적 아젠다를 찾아가는 중에 `행복은 우리 안의 관점에 있다'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가볍게 살 방안들을 모색했다. 하임 샤피라가 위의 책에서 재인용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어원에서 긍정적 의미의 자극을 받고 최인철 교수의 책을 통해서는 행복한 감정 상태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긍정적인 감정들의 상대적인 비율로 측정된다는 것에 관심을 모았다. 다만 긍정적인 감정 경험이 더 많을 때를 행복한 상태라 말할 뿐이지, 부정적인 경험이 전혀 없어야 행복하다고 정의하진 않았다.

그래서 다윗왕은 그 기쁨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계 하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문구를 반지에 새겨 넣고 늘 수신修身했을 것이다. 행복이라는 무형은 어디에 머물다가 현상처럼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삶을 경영하는 내 자신의 관점에 따라 내 삶의 모양도 달라진다. 욕망과 불행의 간극은 지극히 가까운 거리다. 욕망의 크기가 불행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눈을 `What'과 `How'중 어디에 걸어야 할까? 행복은 그 관점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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