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고서야 알았다
꽃이 피고서야 알았다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1.08.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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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여름휴가를 떠났다. 어느 해보다도 긴 휴가다. 얼마 만에 주어진 아들과의 시간인지 모른다. 모처럼 귀한 시간을 내주어 특별보너스를 받은 느낌이다. 그동안 내게 곁을 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다. 친구들이 SNS에 자식들과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을 볼 때면 어찌나 부럽던지. 가끔 심술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시간을 다투는 아들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어쩌다 섭섭할 때가 있다. 이 무슨 모순인지 모른다. 가족이 어렵게 맞춘 휴가를 제주에서 마음껏 즐길 요량이다. 기다리는 동안 아이처럼 들떠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공항 가는 길은 설렌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에 훅 쳐들어오는 쫄깃한 긴장감이 좋다.

제주에는 세컨드 하우스가 있다. 애월에 위치한 조그만 집은 열흘을 매직에 빠지게 할 것이다. 나의 오랜 꿈이기도 한 제주 살기였다.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인 줄 알지만,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꿈을 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나만 보아도 그렇다.

옆에서 제주살기타령을 자주 들은 그이는 혼자서 심각했다고 한다. 허투루 넘기지 않고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넝쿨장미가 담장을 넘던 오월의 어느 날, 그이가 제주에 집을 사자는 것이다. 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지금껏 고생만 시킨 미안함을 내게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렇게 후다닥 우리 집이 되었다. 가족이 제주에서 휴가를 보내다니.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처음 이 집을 보러온 게 5월이었다. 2층 테라스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풍경이 좋아서 선택한 집이다. 바로 앞에는 밭이 있고 너머에는 낮은 산이 보여 마음이 갔다. 밭에는 내 키 정도의 나무들이 심겨 있는데 도무지 무슨 나무인지 알지 못했다. 다른 나무는 한창 꽃을 피우건만 잎만 푸를 뿐이었다.

6월, 7월에도 나무는 같은 모습이었다. 띄엄띄엄 올 때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왜 저런 나무가 심겨져 있는지 슬슬 심통이 났다. 저 나무를 뽑고 귤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 천지가 수국인데 수국을 심었으면 했다. 얼굴도 모르는 밭주인을 향해 볼 때마다 애매한 투정을 쏟아냈다.

다시 8월, 온 밭이 붉은색이다. 예상 밖의 풍경에 놀란다. 밤에 와서 몰랐는데 아침에 누리는 눈의 호사다. 햇살이 꽃잎에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다. 낙화로 누운 꽃잎 위로도 동살이 쏟아진다. 가장 뜨거운 여름에 지난겨울 나무를 감쌌던 수피를 다 벗고 맨살을 드러내며 화사하게 꽃을 피운 배롱나무였다. 한참을 보고서야 알아차린다.

첫 꽃이 지면 곁 꽃이, 곁 꽃이 지면 그 옆의 꽃망울이 서로 피었다 지며 백일동안 피는 꽃. 지칠 줄 모르는 끈질긴 개화를 이어간다. 한 해를 지켜보지도 않고 투정을 해댄 나의 인내가 부끄럽다. 미안한 마음에 내 볼도 꽃처럼 붉어진다.

꽃이 피어서야 알았다. 배롱나무인 줄 꽃을 보고서야 알았다. 기다리면 나무도 제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기다려 볼 일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아들로 하여 한때는 조바심으로 안달했던 적이 있었다. 다 제자리를 찾아가건만 기우(杞憂)였음을 이제야 안다. 자식농사는 어떤 사람으로 커지는지 관심으로 지긋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림은 설렘을 품고 있다던가. 누구도 앞에 일어날 일을 모르기에 생긴 말이 아닐까.

바람이 가만가만 밭을 지나간다. 꽃술이 간지러운지 몸을 살래살래 흔든다. 가만, 귀재면 꽃이 와삭대는 소리가 들린다. 내게는 벙글기 전 꽃잎의 설렘의 아리아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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