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송이
포도송이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1.08.2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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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아차 싶다. 방금 마트에서 사온 포도송이를 꺼내는 순간 잘 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근사한 비닐포장을 벗기는 순간부터 포도는 중심을 잃고 와르르 쏟아지는 거였다. 난감했지만 일단은 소쿠리에 낟알들을 담은 후 물로 씻어 보았다. 판매시기가 훨씬 지난 게 분명했다. 말라버린 꼭지를 포장 때문에 볼 수 없었으니 약간은 약이 올라온다. 당장에라도 들고 가서 교환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성한 것만 먹기로 했다.

반 정도는 버려야 했다. 날씨 탓부터 내게 오기까지 유통과정을 생각해보니 그리 속상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아서 먹은 셈 치기로 했다. 다음부터는 그런 일에 안 닿기로 마음먹는 편이 편한 것 같아서다. 좋아하는 과일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나름 관대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포도송이를 달고 있던 마른 꼭지의 모습이 유난히도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원래 기대했던 맛의 근원은 덜할지언정 그래도 어쩌겠는가. 약간이라도 남아 있는 맛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문득 우리의 삶도 포도의 속성만큼 알알이 붙어서 맛과 기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드는 거였다. 제각각인 듯해도 추구하는 삶의 본질은 같기에 그렇다. 그러나 힘없는 낱알 하나만으로 느끼는 미각과 탐스런 송이에서 배어 나오는 시각의 차이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사람이 서로 다르지만 함께일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좋은 점에 대해서다.

송이와 멀어진 포도 알을 들여다본다. 연일 뉴스에 촉각을 세우며 걸러지는 사건들이 예사롭지 않은 현실에서 꼭지의 기능과 대비되는 거였다. 힘을 잃은 꼭지는 알맹이를 떨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야 말 듯, 요즘 들어 지극한 소시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 그렇지 싶다. 모두가 모기만한 목소리를 지니고 산다 해도 우리는 하나의 송이와 다를 바 없는 입장이 아닌가 말이다.

코로나라는 질병과 온 세상이 맞서고 있다.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일상들이 가슴을 옥죄는 느낌마저 든다. 저렇게 말라버린 포도꼭지마냥 우리는 스스로의 반경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리라. 하나의 과일처럼 신선도를 잃어버린 약한 모습, 우리는 지금 그런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희망이라는 실체에 매달려가고들 있다.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줄을 미처 몰랐다. 아무리 조심하고 열심히 산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상은 두려움을 떠나지 않게 하고 있다. 스스로가 한 세상 보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변변치 못하거늘 이제부터라도 싱그러운 포도송이처럼 삶의 본질이 그리되기를 바라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송이의 기능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건강한 의식을 놓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접시에 남겨진 포도를 바라본다. 초라한 듯한 모습이지만 여전히 검붉은 보랏빛은 원래의 맛을 기억하게 만들고 있다. 문득 탐스런 송이였던 때마저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반경에서부터 속해 있는 사회의 마당까지 서로서로가 하나의 송이와 다를 바 없어야 한다는 미련을 갖기 때문일까. 각기 다른 지체이면서도 함께 맛을 내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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