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하는 선배에 대한 기대
퇴임하는 선배에 대한 기대
  •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 승인 2021.08.1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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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40년 직장을 퇴임하시는 분, 몇 년 전 퇴임하신 분, 3년 후에 퇴임하실 분과 저녁을 같이했다. 눈빛만 봐도 즐거운 분들과의 대화는 단연 은퇴 이후의 삶에 관한 것이었다. 모인 4명의 공통점은 골프를 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두들 골프를 배우려 힘들게 레슨을 받은 분들이었지만 뭔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한다.

퇴임한 선배는 영혼과 정신 그리고 육체가 단단해 보였다. 그분의 삶과 하는 일이 친지와 주변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루하루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이 행복하고 기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은 골프를 치지 않기 때문이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골프를 치지 않아서 가능한 거야.”라고 말했다. 아직 골프를 치지 못하는 3명에게 위안이 되었다. 헤어지면서 선배는 샤인머스켓을 한 박스씩 차에 넣어 주셨다. 평소 먹고 싶었지만 비싸서 감히 엄두도 못 낸 그 과일을….



# 성장하는 중년 이후

`아름다운 것들은/ 땅에 있다// 시인들이여// 호박순 하나/ 걸 수 없는/ 허공을 파지 말라// 땅을 파라'

1956년생 김용만 시인의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는 3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하고 병을 얻어 산골 마을로 귀향했다. 이쯤 되면 남자들의 로망(?)인 `나는 자연인이다'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의 사연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의 시골살이는 세상으로부터 퇴각한 것도 아니고, 고상한 자연예찬이나 출세간적인 물러남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시와 생활은 그가 30여 년 동안 말없이 꿈꿔 왔던 `다른 삶'인 것이다. 이는 60이 훌쩍 넘은 중년의 나이에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퇴직과 질병과 같은 상실 속에서 일체의 나르시시즘을 허용하지 않는, 관념이 아닌 현실로 향한 시인의 시선을 쉽게 읽을 수 있다. 다소 직설적이고 단순해 보일지언정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허황 된 관념과 감상의 삶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 좋은 늙은 선배 되기

직장에서의 퇴직은 인생에서 겪는 많은 외상 중에서 수위 안에 드는 큰 외상이다. 중년기에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이 외상과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

`외상후성장(PTG, Post Traumatic Growth)'이란 트라우마적 상황을 겪었음에도 이전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더 좋은 삶을 살고자 하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의 시간을 슬기롭게 수용하지 못하게 되면 중년과 노년기의 삶은 허무함과 지루함 그리고 비루함에 묶여 지내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급변하는 세상에 뒤처지고 소외될수록 더더욱 시대와 불화하고 과거에 존재했던 학벌과 지위에 집착할 수 있다. 극단적인 사고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늙은 맹수의 마지막 포효처럼 “내가 왕년에”라는 황폐한 자존심으로 세대와 불화할 수도 있다.

은퇴 이후 삶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압도적이다. “은퇴 10년 전부터 준비해야 혀, 골프를 꼭 배워야 혀, 땅을 사 놓아야 혀”등등의 조언은 때론 지금-여기(here and now)의 삶에 집중하는 것을 어지럽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퇴임하는 우리는 김용만 시인의 시처럼 현실에 기반을 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염탐하며 나라 걱정 대신에 사람 걱정하며 후배들에게 과일 바구니 보내 줄 수 있는 좋은 늙은 선배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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