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귀환
장군의 귀환
  • 이재경 기자
  • 승인 2021.08.16 2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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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국장(천안주재)
이재경 국장(천안주재)

 

2021년 8월 15일 오후 8시 50분.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 특별기에서 내려진 장군의 유해가 앞으로 다가오자 문재인 대통령의 눈가가 촉촉이 적셔졌다. 78년만에 돌아온 장군을 직접 대하면서 온갖 만감이 교차는 표정이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굴하지않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한 홍범도 장군(1868~1943). 장군이 돌아왔다. 카자흐스탄에서 영면에 들어간 지 78년만에, 1908년 함경도 북청에서 항일 전투를 마지막으로 고국을 떠난지 110여년여 만이다.

고국, 대한민국은 장군의 귀환 길을 최고의 예우로 환영했다. 이날 1963년 건국훈장을 받았던 장군의 공적을 재평가,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어 광복절 늦은 밤 장군의 유해를 실은 특별기 A330 MRRTT 1호기가 대한민국 영공에 접근하자 F-15K, F-4E, F-35A, F-5F, KF-16D, FA-50 등 우리 공군이 운영하는 모든 종류의 전투기가 출격해 장군을 호위했다. 유례가 없는 최고 대우의 영접이었다.

홍범도 장군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게 된 계기는 봉오동 전투다. 1920년 6월 7일 중국 북간도 두만강 국경 북쪽 40리 지점에서 발발한 이 전투는 일제 정규군에 맞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몇 안되는 전투로 당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혁혁한 전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은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며 일본군의 선봉대가 봉오동 계곡을 통과하도록 유도하고 포위망에 접근하자 일제히 사격을 가해 치명상을 입혔다. 상해에서 독립신문이 호외로 `적 120명 섬멸'이라고 보도할 만큼 , 우리 항일무장독립운동사에서 손꼽히는 빛나는 전과였다.

그러나 장군은 우리 정부 건국 초기에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독립운동 중 일제의 추적을 피해 연해주 일대 구소련 땅에 머물면서 사회주의와 손을 잡은 이력때문이다. 실제 장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 이후 연해주로 후퇴했다가 러일 협약으로 현지(연해주) 독립군이 무장해제되면서 그대로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어릴 때 일찌감치 고아가 돼 돌아갈 곳 없던 `신세'가 된 것이 이즈음 소련에 남게 된 배경으로 설명된다.

이후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 입당했다가 스탈린의 강제 이주조치로 카자흐스탄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장군은 처자를 항일 전투 중에 여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아들 홍순양(1892~1908)은 일본군과 함경남도 정평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순국했다. 한 해 전 부친의 의병부대에 입대한지 불과 1년만이었다. 아내 단양이씨는 비슷한 시기인 1908년 3월 함경남도 북청에서 체포돼 남편의 의병 활동에 대해 취조를 받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졌다. 이때의 상황은 부친이자 남편인 홍범도 장군이 직접 구술로 밝힌 ‘홍범도 일지’에 잘 나타나 있다. 일지에 따르면 아내 단양이씨는 일제로부터 발가락사이를 심짓불로 지지는 등의 고문을 받았으나 완강히 저항하며 혀를 깨물며 자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이같은 사실(史實)이 기록으로 확인되자 홍순양과 단양이씨에게 지난해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8일 대전현충원에 모셔질 예정이다. 국가보훈처는 봉안에 앞서 15~20일까지 홈페이지에 온라인추모공간을 열고있다. 홈페이지(www.mpva.go.kr)를 열면 ‘장군의 귀환’을 접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온라인 헌화, 분향, 추모의 글을 남길 수 있다. 101년전 간도에서 일제를 추상같이 호령하면서 패퇴시키고 대한민국 광복의 초석을 다진 장군의 모습도 생생하게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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