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웃고 있었다
강은 웃고 있었다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8.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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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주인을 잃은 집 앞마당에는 온갖 나무와 푸새들의 자리다툼이 한창이다. 어떻게 왔는지 모를 개복숭아 나무가 한껏 덩치를 키우고, 그 위로 환삼덩굴이 뱀처럼 감겨 올라간다. 달맞이꽃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밤에만 슬그머니 꽃을 피우는 풀이 어느결에 저리도 컸을까. 풀이라기보다는 개복숭아와 키를 견주는 모양새가 나무라 불러도 될 성싶다.

이제는 누구도 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인지 까칠한 명자나무가 마당 입구를 봉쇄해 버렸고, 으름덩굴이 한 번 더 어디가 입구인지도 모르게 감쪽같이 마무리했다. 이때쯤이면 옛 주인이었던 할머니는 아들들을 불러 마당 한가운데 떡 하니 터줏대감 모양 서 있던 자두나무 열매를 따느라 부산스러웠다.

하지만, 자두나무는 할머니가 몸이 아파 병원으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들이 베어내고 말았다. 밑둥만 남은 자두나무 옆에 개복숭아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터줏대감 행세를 하고 있다. 올봄, 개복숭아 꽃은 빈집 마당을 화사하게 만들고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지금은 그 많던 열매가 하나도 없다. 주인도 없는 집이다 보니 누군가 들어와 따 간 모양이다. 주인이 돌보지 않는 빈집은 누구라도 탐해도 된다는 뜻일까.

요즘 정세가 주인 없는, 아니 누구라도 주인이 될 수 있는 빈집의 모양새다. 우리 집에서 보이는 뒷집의 수풀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사가 훤히 보인다.

내년에는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다. 여·야 대권주자들의 다툼이 아비규환의 지경이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도 서슴지 않고 포퓰리즘도 만연하다. 물론 유권자들에게 알권리를 준다는 명목은 좋지만,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정치적 술수로 보일 뿐이라는 게 문제다. 상대가 크면 클수록 더 험한 말이 오가고, 얽히고설킨 관계가 많다. 빈집의 개복숭아와 키를 견주고, 그 위를 칭칭 감아 올라가는 수풀들처럼 말이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체험할 수도, 지니고 다닐 수도, 지혜로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다고 했다. 대권주자들에 대한 무성한 말이 세상이 뿌려지고, 그들의 잦은 선행들이 언론에 의해 하루가 멀게 나타나지만, 진실이란 쉽게 알 수 없는 법이다. 싯다르타는 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강의 소리와 흐름을 통해 그는 마음을 온통 비운 채, 귀 기울여 들었다. 그 속에는 기쁨, 고뇌, 선과 악, 웃고 슬퍼하는 백가지 천 가지의 소리가 끼어들어 한동아리를 이룬다.

이 모든 소리는 파도와 물결을 이루며 흐르지만 결국은 하나의 강물이 되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 다시 지상으로 떨어진다. 싯다르타는 그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 채,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인 생명의 흐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까지 뱃사공 바주데바의 역할이 컸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고뇌와 아픔을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잔잔한 표정을 지은 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싯다르타는 그런 그의 모습을 통해 상처가 아물어 강물과 하나 되는 경험을 한다.

지금은 저리 무성한 수풀도 가을과 겨울이 오면 바짝 말라 부서지거나 앙상한 가지만 남길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면 또 다른 생명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스러지고 없어진 듯하지만 씨앗으로 남아 다른 어느 곳에서 또다시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영원하지 않은 것도 없는 셈이다. 싯다르타가 강물을 통해 깨달음을 얻듯 나도 빈집의 나무와 풀들을 보며 아주 작은 지혜를 얻은 느낌이다.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먹구름을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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