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에서 반려까지
애완에서 반려까지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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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어릴 적 동네에서 키우는 개 이름은 흔히 메리 아니면 도꾸, 쫑이었다. 누렁이, 깜둥이, 백구, 복실이라는 우리 말 이름도 간혹 지어졌으나,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군의 영향 탓인지 유난히 겉멋이 잔뜩 든 꼬부랑말이 유행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였나/ 우리 집에 살던 백구/ 해마다 봄 가을이면/ 귀여운 강아지 낳았지/ 어느 해 가을엔가/ 강아지를 낳다가/ 가엾은 우리 백구는/ 그만 쓰러져 버렸지/ 나하고 아빠 둘이서/ 백구를 품에 안고/ 학교 앞의 동물병원에/ 조심스레 찾아갔었지/ 무서운 가죽끈에/ 입을 꽁꽁 묶인 채/ 슬픈 듯이 나만 빤히 쳐다봐/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 <중략> 백구를 안고 돌아와/ 뒷동산을 헤매이다가/ 빨갛게 핀 맨드라미 꽃/ 그 곁에 묻어 주었지/ 그날 밤엔 꿈을 꿨어/ 눈이 내리는 꿈을/ 철 이른 흰 눈이 뒷산에/ 소복소복 쌓이는 꿈을/ 긴 다리에 새하얀 백구 <하략> 양희은이 `백구'를 노래할 때만 해도 집에서 기르는 개는 한 가족이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사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식구들이 먹다 남긴 밥을 나눠 먹었고, 강아지 때 아이들과 한방에서 지내다가 덩치가 커져서야 마당 한쪽에 따로 집을 만들어 한울타리에서 식구들과 함께 지냈다.

메리, 도꾸, 쫑은 전쟁을 도와준 미군에 대한 경외감 또는 점령군 미군에 대한 은근한 풍자가 담겨 있는 표현 방식이었던 것처럼, 애틋한 가족의 일원이었던 개가 `애완'이라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변한 것은 경제 사정이 어느 정도 나아진 뒤의 일이다. 끼니 걱정에서 벗어나고 `미제'와 `일제' 등 외제를 선망하는 여유가 생기면서 `애완견'은 호사로움의 상징이었다. `똥개'로 통칭하던 토종개는 당연히 `애완'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그 귀엽고 고귀한 세계는 그때까지 보던 것과는 다른 다분히 서양스러운(westernization) 개들이었다.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은 동물애호가라는 신분을 얻었고, 일단의 보통사람들이 한여름 복달임으로 즐기던 보신탕은 영양탕이거나 사철탕의 이름으로 위장하며 으슥한 뒷골목으로 밀려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런 애완견이 `반려'의 이름으로 등극한 것은 1980년대로 추정된다. 견통령으로 불리는 개 훈련사 강형욱은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이 오스트리아 동물학자 로렌츠(1903~1989) 탄생 8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오랜 역사 동안 인류와 함께했던 사람의 친구이자 동반자의 자격을 인정하면서 인간과 평생을 함께하는 동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애완'이라는 낱말은 `동·식물이나 공예품 따위를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보며 귀여워 함'을 뜻으로 하나, 다분히 인간에 의해 종속되어 가지고 노는 개체로 인식된다. `반려'는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하는 짝이나 동무'를 지칭하는데, 거기에 `반려동물'에 이르면 `가족처럼 생각하여 가까이 두고 보살피며 기르는 동물'의 의미를 지니면서 비로소 인간과 동반자 관계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1991년 동물보호법을 제정했고, 지난달에는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조항이 담긴 민법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생명과 동물 그 자체에 대한 법적 지위를 인정하게 된다. 미국의 여성학자이며 생물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한 발 더 나아가 2003년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가 인간의 반려종이듯 인간도 그들의 반려종이므로 서로 반려종으로 상생하자는 `반려종 선언'으로 의미를 확장시킨다.

`반려'로 확장되는 동물에 대한 권리는 비단 사람이 기르는 개와 고양이에 국한될 수는 없다. 우리가 특별하고 각별하게 주목할 것은 사회가 일정부분 봉쇄되고, 경제가 마비되는 코로나19처럼, 지금까지와 앞으로 다가올 대부분의 전염병이 동물로부터 매개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동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각성은 그래서 더 절실하다.

다만 `애완'에서 `반려'에 이르기까지 동물에 대한 권리와 생명윤리의 상승만큼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반려는 어디쯤 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일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어딘가의 우리의 노동자가 진정으로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하는 짝이나 동무'로 인정받는 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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