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의 기억
빗소리의 기억
  • 이창수 시인
  • 승인 2021.08.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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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수 시인
이창수 시인

 

초저녁에 빗방울이 보이더니 밤이 이슥해지며 빗소리가 요란하다. 마른 장마 중에 듣는 청량한 낙숫물 소리가 더욱 반갑다. 무심한 빗소리가 오래된 기억을 끌어내고 기억은 빗소리를 타고 흘러간다.

사립학교 서무과장 차석으로 회계업무를 담당하던 때이다. 수업료는 당해 분기 내에 미납하면 3차례 걸쳐 독촉하고 마지막 독촉에는 `독촉 기한 내에 내지 아니하면 제적된다'는 경고를 한다. 그런데 마지막 독촉 뒤에도 미납일 경우 제적해야 하는데 이게 좀 곤욕스럽다. 규정대로 하면 그만이지만 당해 학생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잘못 없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이니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3차 독촉이 끝나고 제적해야 하는데 미적거리고 있으니 이는 내가 봐도 직무유기고 업무 태만이다. 담임 선생님과 상의해 봐도 대책은 없고 아이 처지는 딱하다. 아이 엄마가 아비 없이 낳아 할머니한테 맡겨 놓고 행적이 묘연하고, 할머니는 농촌에 살며 같은 교회 교우의 도움으로 그 집 호적에 올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이 아이의 처지가 애처롭다.

중학교까지는 할머니가 품팔이하거나 외삼촌이 내서 졸업하고, 할머니 몰래 고등학교 진학시험에 합격해 등록금만 대준 외삼촌. 학비 낼 처지가 못돼 담임이 소문 없이 상반기 학비를 내주고, 3/4분기 수업료 미납으로 인한 제적처리를 놓고 고민에 쌓였다.

그 아이 처지를 듣고 보니 제적하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더 미룰 수 없는 마감일이다. `오늘은 처리해야 한다. 어떡하나! 이걸 어떡하나?'하다가 `에라 내가 내고 말지'하고 가계수표로 냈다. 어찌 됐건 마음이 산뜻했다.

헌데 은행 다녀온 직원이 발설해 대납한 것을 과장이 알게 되었다. 과장과 약간의 실랑이로 담임이 알게 되고 이 과정을 거치며 아이의 학비는 어떻게 하든 우리가 주선하자는데 생각이 모였다.

점심때에 학생 2명이 선생 구두를 털고 닦는 게 보였다. 아이들이 점심 종 치면 내려와 구두를 닦다 수업 종 치면 교실로 올라갔다. 땅이 질은 날은 쉬는 시간에도 했다. 문득 일손이 부족해 보이기도 하고 구두 닦는 일에 그 아이가 합류하면 학비 해결도 가능할 것 같았다.

본래 구두 닦기 일자리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일해서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선생님들이 십시일반으로 내서 만들어진 자리다. 학생과장을 만나 전후 사정을 알리고 전 교사의 찬성을 얻어 녀석의 4/4분기와 2학년 학비는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3학년 때는 진학지도 관련 제외규정이 있어 일할 수 없었다. 외부 장학금을 알아봐야 하는데 성적 우수자의 장학금은 있어도 이렇게 중간성적의 외롭고 힘든 학생을 위한 장학금은 없었다. 기회 닿을 때마다 알아보았지만 1회는 흔해도 4회를 연속자급해줄 장학금은 귀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은행 청주지점 직원 상조회에서 학기별로 1명의 장학금을 준다는 정보를 알고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의 사정을 들은 상조회에서 장학금 지급이 결정돼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생각할수록 고맙다 참으로 고맙다. 낙숫물 소리를 타고 옛 기억을 더듬다 보니 그 녀석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꿈을 키워가며 살고 있기를 바라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를 빌어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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