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심술
철학자의 심술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1.08.04 1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철학과에 들어가 나는 심한 좌절을 겪었다. 책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한글이기 때문에 소리를 내서 읽을 수도 있는데 뜻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지진아인가? 나는 철학적 소질이 없는 걸까? 철학자들이 원망스러웠다. 왜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쓸까. 짜증 나게. 나중에 알고 보니 번역이 잘못돼서 한글로는 쓰였지만 우리말로 생각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도 있었다.

어느 정도 글을 이해할 수 있게 되니 글 때문에 두 번째 좌절을 겪었다. 글재주가 없었던 것이다. 시험을 볼 때면 머릿속에서 지진이 난다. 글도 빨리 못 쓰는 데다 논리 구성도 안 되고 쓰다 보면 자꾸 어긋나 시간 맞춰서 답안지를 작성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글을 쓸 때면 과거의 경험 때문인지 가급적이면 쉽게 쓰려고 한다. 곧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쓰려고 한다. 그런데 가끔 철학자처럼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건 중요하다. 가끔은 독자도 내 생각을 따라올 때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철학자처럼 써볼까?

철학은 자신을 돌아보는 작업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 안에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온다는 걸 안다. 이 생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생각의 연원은 어딜까? 모른다.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일까? 그만이 아니다. 뿌리를 들여다봐야 한다. 어떻게 들여다보지?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의 뿌리는 사라진다. 생각이 일어났다면 뿌리를 보는 건 사후(post hoc) 분석이 된다. 사후 분석으로는 생각의 뿌리를 들여다볼 수 없다. 밖으로 드러난 생각이 왜 일어났는지, 이 생각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는 있지만 이 생각의 뿌리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줄 수 없다.

왜 그럴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이것(此)을 생각의 뿌리라고 하고 저것(彼)을 일어난 생각이라고 해보자. 그럼 위 법칙의 앞 구절은, 생각의 뿌리(이것)가 있으면 곧바로 현재의 생각(저것)이 있게 되고, 생각의 뿌리가 일어났다는 건 현재 생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생각의 뿌리가 있으면 곧바로 현재 생각이 일어나는데 현재 생각은 다시 이것(此)이 되어 저것(彼)(다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일어나게 한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로 다음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현재 일어난 생각(이것)을 두고 `이게 어디서 왔지?'라고 묻는다면 바로 그 물음이 다음에 일어난 생각(저것)이 된다.

당연히 그에 대한 답은 저것이 되고 질문은 이것이 된다. 현재 일어난 생각에 `이 뿌리가 뭐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저것으로부터 이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저것을 이것으로 놓고 이로부터 저것 1, 저것 2를 전개하는 과정이 된다. 현재 일어난 생각의 뿌리(이것)를 캐고 들어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일어난 생각을 당연시하고 그걸 전제로 성립하는 다른 생각(저것)으로 발전되어 간다.

이상에서 나는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의 뿌리를 캐고 들어갈 수 없다는 걸 부처의 연기론을 통해서 논증했다. 개념도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 저것, 있음, 없음, 일어남, 사라짐, 생각, 뿌리 정도만을 사용한 것 같다. 어려운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논증 안 하고 정리하면 생각을 무턱대고 하지 말고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를 들여다보라는 말이다. 그걸 뭐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냐고? 그게 철학자들의 심술이다. 왜 심술을 부리냐구? 고참에게 많이 시달린 병사가 신참을 많이 괴롭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충북대 철학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