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시시한 일상 - 壁花
지극히 시시한 일상 - 壁花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8.03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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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밤새 억수로 쏟던 비는 새들의 아침 목욕을 거르지 않도록 멈추었고 미처 땅에 안착하지 못한 빗방울도 잎새 끄트머리에 잠시 멈춘 아침이다. 여느 때 같으면 눈을 뜨면서 장딴지까지 오는 목이 긴 양말에, 두꺼운 긴 바지, 깃이 있는 긴 팔의 셔츠를 착용(?) 중무장출전. 첫 번째로 향하는 곳은 우물, 두레박을 들고 바로 투하, 8리터쯤은 되는 두레박으로 우물을 길어 물뿌리개에 옮겨 담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모기를 뚫으며 연신 텃밭으로 정원으로 나른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학수고대하던 용병이 야간출동으로 수고로움을 덜었다. 더없이 특출한 장비로 중무장한 지원군이 밤새 퍼부었으니 우물을 길어 올리며 땀을 흘릴 필요가 없다.

우물을 길어 담는 소리에 잠이 깨던 녀석들은 진즉 잠에서 깨었다. 게다가 억수로 보약을 들이켰기에 모두 넉넉히 부른 배를 두드리며 행복에 겨운 기색이다. 그러잖아도 녹음이 절정인 때인데 보약까지 마셨으니 생기가 이만저만 아니다.

수돗물도 아니고 우물물도 아닌 빗물이니, 빗물엔 질소 79%에 산소 21%라는 수치가 붙는다. 거기에 용존산소량도 높고 식물이 가장 잘 자란다는 약산성의 pH 수치를 더하니, 포만감에 만족감에 더 이상의 바람은 죄가 될 터이다.

제법 여유로운 출근이 될 아침이다. 양손에 물뿌리개가 없이 간만의 단비로 촉촉이 젖은 뜰을 하릴없이 배회한다. 작은 텃밭이 딸린 뜰이지만 발걸음이 닫지 않은 곳을 골라 거닌다. 도린곁이다. 한없이 느리고 보폭이 없다. 전날까지 보이지 않던 이끼를 따라 걷는다. 이끼가 다칠까 비켜 디딘다. 간만의 빗물을 가장 맛있고 감사히 받은 것은 이끼다. 아니 일제히 우산을 펼쳤으니 이끼 사이의 벌레들이 비를 맞지 않게끔 한 비상사태였을지도 모른다. 색도 두께도 제법 짙어지고 부풀었다. 맨발로 밟아 볼까? 머금고 있던 빗물이 벌레들이 튀어나올까? 잠시 머뭇거린다.

머뭇거리게 하는 것은 바닥의 이끼만이 아니다. 여태 볼 수 없었던 이끼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멘트벽면의 이끼다. 50여 년을 넘게 살아온 터인데 생경하다. 출근 시간도 잊은 채 아예 멈췄다. 언제부턴 가는 이끼가 필 기미라도 있었을 텐데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 내가 살던 터의 경계부분인데 너무 낯설다. 벽에 펼쳐진 이끼는 더없이 섬섬하다. 물을 많이 받은 위에서 적게 받은 아래쪽까지 색과 두께가 다르다. 포도송이가 빼곡하고도 즐비하게 달린 듯 피었다.

폭염에 넓은 잎을 가진 녀석들은 타들어가고 장대비를 맞이하고도 숨이 죽어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이 경이롭고도 생경한 풍경의 주인공은 벽에 녹색의 꽃을 장대하게 피웠다. 수년간 수십 년을, 물 때, 흙먼지를 켜켜이 쌓고 포자를 안으로 증식시키고 과묵하게 기다렸다. 아등바등 애써 드러내지 않았다. 살아있는 이유, 살아가는 이유는 없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필 것을 알았기에 나지막이 외로움을 즐겼다. 절박할 정도로 갖춘 것이 없다. 못 가진 것에 대한 욕망도 없다. 결핍이 오히려 위대한 꽃을 피웠다. 시멘트 벽면의 이끼는 한 포기 강아지풀까지 더했다. 푼푼한 이끼 벽화碧花가 만들어낸 벽화壁花다.

비 오듯 땀이 옷 속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감내하면서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폭염 속에도 쉼 없이 움직임을 이어가는 상황에 비가 내렸다. 억수 같은 빗속에서 나만 비를 맞은 것은 아니다.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채 떨어트리지 못한 잎새 끄트머리의 빗방울이 이마에 똑하고 마저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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