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7.11 23: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입술
김 혜 식 <수필가>

입술이 마음의 채찍이 되었음을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았다. 립스틱을 칠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입술은 유난히 붉고 예뻤었다. 어린 날, 그것이 열릴 때마다 우리들의 가슴은 한 뼘 씩 자랐고, 심연도 한층 깊어만 갔다.

또한 사춘기 시절, 가슴 속에 이유 없는 반항심이 일 때도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이 안 봐도 보는 것처럼 행동하라. 항상 남 앞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설 일만 행하라.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라."

어머니의 이런 말씀들은 질풍노도 같은 그 시절 나의 가슴을 타고 혈관으로 온전히 녹아들었다. 그것은 곧 나의 영혼을 살찌웠고 강직한 정신의 원류가 됐다. 삶의 표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뤄 '말은 인간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약이다'라는 R. 키플링의 말이 맞는 성 싶다.

인생길에 헛발질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동안 삶의 고통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탐욕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단정한 입술에서 나온 말씀 덕분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여러 자식들을 남부럽잖게 키운 어머니. 그런 힘은 과연 어디서 우러나온 것일까. 오로지 강한 모성애로만 치부하기엔 어머니의 그 희생이 너무나 지극하고 숭고하다.

젊은 날 복사꽃처럼 어여뻤던 어머니의 외양도 이젠 온통 주름살 투성이다. 그토록 앵두 같던 붉은 입술도 빛바랜 무명처럼 허옇다. 흐르는 세월 속에 지엄한 회초리였던 어머니의 입술도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핏기 없는 어머니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 이야기로만 여겨 아무도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세대차이, 시대에 뒤떨어진 공자 같은 이야기라고 일축할 뿐이다. 목숨처럼 여겼던 자식들 앞에서 어머니의 입술은 어느 사이 서서히 닫혀만 갔다. 서릿발 같던 어머니의 그 말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자식들이 제각기 둥지를 틀은 후, 어머닌 홀로 회색빛 시멘트 숲에 갇혀 살며 어느덧 자식들의 입술에만 의지해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살기 바빠 가끔씩 드리는 안부전화 한 통화에도 감격하는 어머니가 참으로 측은하고 애처롭다.

이즈막엔 걸핏하면 이 자식 저 자식한테 전화해 당신이 행한 일을 거듭 확인한다. 어느 땐 당신 자신을 자책하며 이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혼잣말처럼 푸념하곤 한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대할 때마다 자식된 도릴 다 못하는 불효에 억장이 무너진다. 혹시 어머니가 치매 초기 증세가 아닐까하는 기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리곤 당신말씀처럼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뜨면 어쩌나 싶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엇으로 어머니의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아 드릴까. 어머니의 빈 가슴을 그 어느 것으로 채워 드려야 할까.

고심 끝에 화장품 가게를 찾았다. 그곳서 친정어머니께 드릴 빨간색의 루즈를 골랐다. 빨간색깔이 어머니 연세에 걸맞진 않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그것을 입술에 바르며 그 순간 만큼이라도 당신이 여자였음을 확인하길 소망했다. 그러자 갑자기 나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