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뽑으며
풀을 뽑으며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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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주말 아침 6시부터 청주시 내덕1동 청주농업고등학교 둘레길에 막 자란 풀을 뽑았다. 이곳은 청주시 도시재생뉴딜사업의 일환으로 벚나무와 이팝나무, 사철나무, 화살나무, 쥐똥나무 등을 길 따라 심어 단장한 곳이다. 청주농고를 빙 두르고 있는 인도에 나무를 심어 녹색으로 단장하고 걷기에 쾌적한 길을 애써 만들어 놓았는데, 건들장마가 지나면서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주민들로 구성된 도시재생추진협의회를 비롯해 내덕1동 주민센터, 지역구 시의원까지 주말 이른 아침인데도 20명 남짓 함께 하면서 풀들과 한바탕 씨름했다. 갸륵한 것은 주민들이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동네의 시설과 단장은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가꾸고 보살펴야 한다”는 의기투합이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어느 후배 작가가 무심코 내뱉은 `이름 없는 꽃'이라는 말을 일갈하며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은 없다. 다만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흙과 단단히 결합해 있는 풀줄기의 맨 아랫부분을 힘주어 잡고 뿌리째 뽑아보지만 사람이 심어 놓은 나무들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풀들이 틈새마다 다투어 자라고 있다.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기듯이 자라는 땅빈대를 비롯해 쇠비름과 질경이에 이어 딱지꽃, 바랭이, 사초, 강아지풀, 뚝새풀, 삘기는 쉽게 뽑히기를 거부하며 안간힘을 쓴다. 거기에 명아주, 개망초, 억새, 쇠무릎에 이르면 둘레길 비좁은 땅은 아예 풀들의 다채로운 터전이다.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김종해. 풀>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풀은 없다. 자연인데 인공이 되어버린 벚나무와 이팝나무, 화살나무와 사철나무의 단장은 뚝뚝 부러지는 가지에 두툼한 잎사귀로 사람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씨앗이거나 작은 묘목이 되어 어딘가에서 거름을 듬뿍 받고 때 되면 알아서 물을 뿌려주는 `조경'의 나무들 틈 사이에서 뿌리를 살짝 감싼 흙에서 발아를 기다렸거나, 바람을 타고 흔들리다가 겨우 비좁은 땅을 찾아들었을 풀들.

풀들은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다만 저항하던 제 몸이 끝내 견디지 못할 때 처절하게 제 몸이 찢기거나, 아예 앙 물었던 흙부스러기를 놓아버리고 뿌리째 뽑히며 장렬하게 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쓰레기봉투에 담겨 폐기물이 되거나, 운 좋으면 거름이 되어 다음 생을 기약할 수도 있겠다.

나란히, 가지런하게 줄지어 심어진 둘레길 나무들을 지나 회전교차로에 만들어진 풀밭으로 간다. 커다란 소나무 아래 솔씨가 떨어져 아기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거기에도 풀은 무성한데, 다만 이곳에서 잔디는 풀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적'하지 않은 금계국 노란 꽃도 뽑히고, 제철을 맞아 불쑥 키가 커 버린 접시꽃도 이곳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 아파해야 합니다// ...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은데 <도종환. 접시꽃 당신 중에서> 그날 뽑힌 풀들은 도시를 재생시키려는 동네사람들의 가슴에 담겨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사람들은 목적에서 해방되어 각자의 풀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우리가 언제까지 질서정연할 수 있을 지 작별한 풀들에게 자꾸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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