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시시한 일상 - 밤의 소리와 낮은 바람
지극히 시시한 일상 - 밤의 소리와 낮은 바람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7.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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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소리가 쩌렁쩌렁. 분명 벌레 소리인데 예전에 듣던 소리가 아니다. 득음한 소리꾼의 소리인 듯 맑은 목청을 돋운다.

어떤 벌레인지 호기심에 귀를 쫑긋 세우고 발걸음은 소리를 향한다. 이런! 웬만한 풀벌레는 인기척에 소리가 멈추는데 이 소리는 가까이 갈수록 더 커진다. 구멍이 보인다. 지렁이인가? 지렁이 구멍은 대개 하나인데 이 구멍은 네 개다. 구멍의 크기도 좀 더 커다랗고 명확하다. 구멍에 불빛을 넣어 물끄러미 쳐다보는 내내 소리는 더 우렁차게 들렸다. 지렁이라면 울음을 멈추고 몸을 뒤로 빼는데, 도저히 알 수 없는 원인(?)에 도저히 듣고만 있을 수 없다. 주변의 나뭇가지를 주어다 구멍을 헤집는다. 이런 개밥뚜기(땅강아지)다. 두 개의 앞발을 땅에 대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는 위풍당당 위세다. 어릴 적 손안에서 탈출하려는 녀석과 힘껏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팽팽한 접전의 기운이 느껴진다. 지렁이 소리를 찾아 근거지를 마련한 힘센 녀석의 우렁찬 포효(?)였다.

아침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시작하고 밤은 벌레들의 구애소리로 시작된다. 그렇게 밤이 깊어갈수록 소리는 커지고 낮과는 다른 화음의 장이 전개된다. 밤은 벌레들의 세상이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어둠이 짙어질 즈음, 온종일 재잘대던 새들이 둥지로 들 즈음 벌레들이 소리를 낸다. 낮 동안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방아깨비, 여치, 땅속의 지렁이, 어떤 벌레의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은 벌레들의 천국이다. 그렇게 한낮을 채웠던 새와 매미가 내어준 시간은 이름 모를 벌레들이 채운다. 소리의 원인을 찾는데 어떤 벌레 소리인지 가늠할 뿐이지 직접 확인하기가 어렵다. 소리 나는 쪽으로 발길을 틀기만 해도 소리는 멈추고 먼발치의 다른 곳에서 소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불을 켜고 가까이 봐도 도통 어떤 녀석인지 알 수가 없다. 새처럼 부리를 벌리는 것도 아니고 몸에서 날개를 비비면서 낸다고 하는데 워낙 작은 녀석들이다 보니 분간하는데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다.

그래서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보이지 않기에 귀가 열리고 마음에 운율이 노닌다. 강하거나 빠른 것이 없다. 높지만 간결하고 깨끗한 음이 끊이질 않는 지루하지 않은 소리가 매일 매시간 새로이 든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창공, 시간의 흐름에 뭉게구름이 드높음을 가늠케 한다. 여유롭게 흐르는 구름은 서로가 부딪힘 없이 비켜가며 더 높지도 않게 더 낮지도 않게 자리를 바꾼다. 지상은 변덕스런 날씨와 폭염에 습도마저 높은데 하늘은 뭉게구름과 더불어 맑고 상쾌한 듯하다. 그런 날 깊은 바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다. 오랜 시간 고인 물을 길어내고 부유물이 가라앉은 바닥에 발을 딛고, 물과 함께 흘러든 모래와 함께 서둘러 두레박으로 퍼 올린다. 그러면서 몸은 땀으로 뒤범벅이고 얼굴은 상기된다. 드디어 뽀얀 속살의 암반이 드러났다. 동시에 상기된 얼굴을 서늘한 바람이 어루만진다. 깊은 바닥 돌 틈으로 물이 들면서 바람이 든다. 바닥 돌 틈에서 물과 함께 새로운 바람을 맞는다.

나이가 들면서 눈을 감는 시간이 짧다. 문명의 이기 덕분이 아니더라도 더해가는 근심 걱정도 한몫한다. 그러니 제대로 된 소리를 들을 여지가 줄어든다. 어둠이 내려 보이지 않을 때 소리는 더욱 선명해진다. 눈을 감지 않아도 들리는 것들과는 다른 소리다. 향이 나는 꽃은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게 하고 눈을 감게 만든다.

물 위의 수련은 진즉 잠을 청하려 잎을 닫았고, 날 것에 먼저 향을 내 주던 백련도 합장하듯 꽃잎을 일제히 오므리고, 덩달아 자귀나무도 합환(合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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