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를 꾸짖은 말이다
군주를 꾸짖은 말이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1.07.18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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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임진왜란 때 경상우수사를 지냈던 배설(裵楔)이라는 인물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를 탄생시킨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그는 임란을 통틀어 우리 수군이 당한 유일한 패배이자,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입은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던 장수이다. 이순신이 항명죄로 파직된 후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은 원균의 지휘 아래서였다. 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잽싸게 전장을 빠져나와 도망쳤는데, 그때 이끌고 나온 배가 12척이었다. 이 12척이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명량대첩의 기적을 일군 밑거름이 됐다. 이순신의 결연한 의지를 담은 명언과 역사적인 승리가 한 장수의 비열한 줄행랑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사족을 달자면, 배설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다시 한번 삼십육계 주특기를 발휘했다가 붙잡혀 참수당했다.

이순신의 12척 발언은 선조의 교지에 답했던 장계에 등장한다. 선조는 “수군이 완전히 전력을 상실해 해전이 불가능해진 만큼 뭍으로 올라와 육군에 합류해서 육상 방어에 주력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하달했다. 해군을 폐지하자는 주장이었다.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반대했다. “우리가 바다를 포기하면 이미 칠천량에서 기세를 올린 일본 수군이 파죽지세로 서해로 올라가 경기와 충청을 위협할 것입니다. 호남에서 승기를 잡은 육군까지 호응하면 당장 한양까지 위태로워질 게 뻔합니다. 일본이 원하는 계책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신에겐 아직 12척이 남아있습니다” 였다. 왕의 한심한 전략을 바로잡고자 덧붙였던 말이다. 이순신이 잔뜩 사기가 오른 일본 해군의 주력을 명량에서 꺾지 못했다면 선조는 다시 피란길에 올랐을 것이다.

이순신의 이 말이 최근 다시 회자됐다.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 대한체육회가 도쿄올림픽 한국 선수촌에 이런 현수막을 내걸었다가 철거했다. 일본의 보수 언론이 발끈하고 극우단체가 항의 시위를 벌이자 올림픽위원회(IOC)가 일본 정부를 대신해 대한체육회를 압박한 결과다. 도쿄 올림픽기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해 우리를 도발한 일본에 일격을 날리려는 의도는 이해하겠지만 시의적절한 발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순신의 12척 발언은 그릇된 인사로 해군을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장수에게 어리석은 계책을 훈수하는 우매한 군주를 꾸짖은 말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현수막이 하릴없이 내려지자 이번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가 등장했다. 그는 한 방송사 기자를 만나 “일본 정부는 한·일 관계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마스터베이션(성적 자위행위)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관이 수교 중인 국가원수를 모독한 가장 해괴망측한 말로 국제 외교사에 남을 일이다.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한국만 몸이 달아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는 말을 이런 상스러운 비유를 들어 전한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최근 일본 언론에는 한국 정부가 정상회담을 애걸하는 듯한 보도도 잇따른다. 문 대통령이 23일 도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할 경우 이뤄질 스가 총리와의 회담을 다룬 보도이다. 한국 정부는 1시간 이상의 정식 정상회담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은 15분짜리 약식 회담을 제안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부 관계자의 입을 빌려 `뭔가를 협의하거나 교섭하는 자리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청와대가 오늘 문 대통령의 도쿄 올림픽 개막식 참석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일본이 문 대통령에게 만만찮은 반대여론을 무릅쓸 명분을 한 줌도 주지 않고 있으니 청와대는 답답할 것이다. 일본을 꿰뚫고 늘 유리한 위치를 선점해 전승을 거둔 이순신의 안목은 선수촌 현수막이 아닌 외교 역량에서 재현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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