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무게
이름의 무게
  • 신찬인 충북도청소년종합진흥원
  • 승인 2021.07.14 20: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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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신찬인 충북도청소년종합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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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들어간 동굴 안에는 양과 치즈가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던 일행은 주인이 없는 동굴에서 이것저것 음식을 찾아 먹는다. 그러던 중 주인인 외눈박이 거인이 돌아왔고 일행은 동굴에 갇히게 된다.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은 일행의 수장에게 이름을 물었고 그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요.”라고 대답한다.

거인이 잠들자 불로 달군 말뚝을 거인의 눈에 박고 일행은 도망쳤다. 화가 치민 거인이 쫓아오자 일행의 수장은 “나는 오디세우스다.”라고 외치며 도망간다. 그러자 거인은 그들의 배를 전복시키려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를 던지고, 그의 아버지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 에게 폭풍을 일으켜 벌해 주기를 청한다. 희랍의 신화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심리는 참 복잡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굴에 갇혀 무기력했을 때는 자신의 이름을 `아무것도 아닌 자'라고 했던 사람이 거인의 눈에 말뚝을 박고 도망치면서는 구태여 이름을 밝혀 또 다른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름이란 어떤 의미를 주는 걸까? 누구나 태어날 때는 그저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난다.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 비로소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이름이라는 존재의 무거움은 평생 동안 자신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때로는 학자나 예술인, 공무원 등 직업이 이름에 경중을 가늠하게 하고, 때로는 어떤 품성을 지녔는지에 따라 호감이 가는지 아니면 혐오감이 드는지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사람이 살아온 총체적 결과물이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자신을 지켜주는 보루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을 때 사람들은 이름값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행적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는 이름값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경멸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한때 대도(大盜)로 알려졌던 사람이 좀도둑질했을 때, 사람들은 마냥 비웃곤 했다. 부끄러운 짓을 한 누군가는 그 이름 석 자의 더러움과 가벼움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름을 걸고 하는 행위에는 크건 작건 그 사람이 지켜야 하는 자존심이 함유되어 있다.

`김영식이용원'에 처음 간 것이 4년 전 이다. 집 주변에서 몇 군데 이발소를 탐색하던 중 `김영식'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성품이 깔끔하고 정성을 다해 이발하는 분이었기에 그 후로 줄곧 그곳을 이용하고 있다.

내겐 아직도 직장 생활할 때의 호칭이 따라다닌다.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오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그저 `아무것도 아닌 자'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여전히 예전의 색 바랜 호칭이 붙어다닌다. 퇴직을 하면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 공무원이었던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오디세우스가 `아무것도 아닌 자'였을 때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웅답지 못하게 잠자고 있는 거인의 눈에 말뚝을 박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밝히는 순간 고난과 시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굳이 이름을 밝혔던 것은 이름을 걸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내 이름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부른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을 의식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부르는 나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내 이름 석 자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자유롭게 살아갈지 이름에 얽매여 불편하게 살아갈지 오늘도 나는 그 경계에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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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자 2021-07-15 11:31:09
좋은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