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 있는 꽃
누워 있는 꽃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1.07.13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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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개양귀비 꽃이다. 화단 돌 틈 사이에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누워 있다. 왜 하필이면 저곳이란 말인가. 부실한 꽃잎은 햇빛 한 줌이라도 더 받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분명 바람에 실려 와서 자리를 잡았을 터인데 절정의 꽃무리를 벗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측은했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할 만큼 눈길을 빼앗겨 버렸다.

흔히 보아오던 꽃잎의 색은 지나치지 못할 만큼 화려하다. 그런데 지금 저 꽃은 그렇지가 않다. 제대로 성장을 못 하고 간신히 버텨가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질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눈에 닿은 느낌이 예사롭지가 않아서였다. 문득 다가오는 주변의 삶,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라 가슴을 헤집어 놓고 말았다.

일어설 힘을 잃었지만 꽃의 속성에서 깊이를 발견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리라. 살아 있다는 자체가 귀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은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셨지만 생전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라서 자꾸 저 꽃과 대비되고 있다는 사실에 숙연해지고 있다. 시든 꽃의 얼굴로 자식을 대하시던 마지막 기억이 어제인 양 생생하기에 슬픔과 씁쓸함이 겹쳐 든다. 모든 생명의 처음과 나중, 그리고 지금의 내 입장에 대해서도 마냥 지나칠 사건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이다.

사람이 꽃과 같다고들 얘기하며 산다. 어린 생명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꽃피우느라 일생을 바쁘게 이어가는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저마다의 분량대로 치열한 몫을 감당해가는 자체가 얼마나 고귀한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에 이른 꽃을 보노라면 안타까움이 스미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후일에 내 모습인양 미리부터 겁도 나고 걱정스러워서다. 하루 앞도 못 내다보며 지내는 삶일지언정 가능한 고통의 모습은 피해가고 싶다는 마음을 누군들 품고 있지 않을까.

세상은 많이 변해 버렸다. 자식이 부모를 마지막까지 모시고 산다는 이야기가 드문 형편에 이르렀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증명해 낸다. 거기에다가 요양원이라는 이름도 이제는 생소하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선입견만이 아닐뿐더러 들여다볼수록 적막한 기운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친정 부모님도 그렇게 사셨으니 묘할 만큼 산다는 것에 대해 심오한 생각이 첩첩 쌓이고 있다.

누운 꽃을 향해 틈만 나면 다가선다. 곁에서 싱그럽게 서 있는 다른 화초들과 달리 은근한 눈길을 주느라 바쁘다. 그것은 함께 라는 이유를 두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일이 되기도 했지만 누워 있건 서 있건 사람도 그와 같다는 진리가 자리를 잡는다. 똑같은 하늘 아래서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살아갈진대 이렇게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생명들이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지 새삼 엿본 기회였다.

꽃의 줄기와 이파리가 푸른색을 넘어선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살아 있는 모습이 용해서 깊은 의미의 눈길을 아끼지 않는다. 버티어 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과 흡사 해서다. 어쩌면 나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를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내 눈에 또 한 번 자리 잡은 생명의 존엄성이 이런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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